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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산소호흡관, 내가 뽑았어

남편의 산소호흡관, 내가 뽑았어

Astraea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죽음의 예언

  • 남편이 자기 첫사랑 때문에 내 앞에 이혼합의서를 들이댄 그날 밤,
  • 나는 웃으면서 그가 건넨 펜을 받았다.
  • “재산 전부 다 내놔. 그럼 바로 사인할게.”
  • 역시 돈밖에 모른다며 비웃는 남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 “어차피 넌, 이제 24시간밖에 못 살아.”
  • 그날 밤 그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됐다. 나는 직접 산소호흡기를 떼면서 그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번엔, 내가 보내 줄게.”
  • ...
  • 먹물처럼 짙은 밤,
  • 별장 거실에 있는 안지훈은 얼굴엔 노골적인 짜증과 싫증이 그대로 드러났다.
  • 안지훈이 종이 몇 장을 거실 탁자에 탁 내리치자 둔탁한 소리가 났다.
  • “이아린, 사인해.”
  • 목소리엔 온기라곤 없었다. 묻는 것조차 귀찮은 듯, 명령만 가득했다.
  • “가영이 오래 못 기다려.”
  • 김가영. 안지훈의 첫사랑, 발레단 수석 무용수.
  • 지금쯤 아파트에서 “힘들다, 외롭다”는 핑계를 대며 위로해 달라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나는 안지훈의 바로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
  • 조금 전까지 요리하느라 입었던 후줄근한 앞치마. 아직 그대로였다.
  • 탁자 위 종이들을 힐끗 보니, 역시나 이혼 협의서였다.
  • 진짜, 멍청하다 못해 답답했다.
  • 지난 몇 달, 나는 모르는 척, 양보하는 척 두 사람을 밀어줬다.
  • 덕분에 안지훈은 물론, 김가영까지 지금이 나를 밀어낼 최적의 타이밍이라 믿게 됐다.
  •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협의서가 아니라, 오만함 가득한 안지훈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 예전엔 그 눈빛 속 냉기가 내 심장을 찔렀지만, 지금 내 마음엔 해방감만 끓고 있었다.
  • “더 할 말 없어?”
  • 내 침착함이 의외였는지,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 이 남자는 아마 내가 울고불고, 난리 피우며 비굴하게 매달릴 거라 생각했겠지.
  • 하지만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가볍게 웃고, 손을 뻗어 서류 뭉치를 집었다.
  • “네 재산 내놔.”
  •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네 명의 모든 지분, 펀드, 예금... 전부 내 앞으로 돌려. 방금 내가 말한 내용을 이혼합의서에 넣어서 다시 출력해. 새 합의서 나오면 바로 사인해 줄 테니까.”
  • 안지훈은 눈에 띄게 멈칫했다.
  • “무슨 뜻이야? 나를 빈털터리로 만든 뒤에야 내쫓겠다는 거야?”
  • “부동산은 아직 네 명의로 돼 있잖아?”
  • 내 말에 안지훈은 아주 익숙한, 극도로 나를 깔보는 웃음소리를 내며 비아냥거렸다.
  • “이아린, 내가 널 정말 얕봤네.”
  • 피식 웃더니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고, 물건값을 매기듯 나를 훑었다.
  • “빙빙 돌리더니 결국 돈이었네. 돈 말고 뭘 바라겠어, 너 같은 여자가?”
  • 뭘 바라겠냐고?
  • 네가 돈 한 푼 없을 때 내가 같이 버틴 고생, 기억 안 해?
  • 네가 사업 시작할 때 밤마다 함께 지새운 시간, 생각 안 나?
  • 성공 후 내게 안긴 끝없는 냉대와 배신, 이제 보상해 달라면?
  • 속은 뒤집어지고 미칠 것 같았지만, 얼굴은 잔잔한 호수처럼 흔들림 하나 없었다.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가볍게...
  • “그래. 난 돈만 있으면 돼. 어차피...”
  • 말을 잠시 멈춘 뒤, 고개를 들어 비아냥거리는 안지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 “어차피 넌, 이제 24시간밖에 못 살아. 그러니 서둘러야지, 안 그러면 나와 김가영, 누가 재산 더 많이 챙길지 싸워야 하지 않겠어?”
  • 그 순간, 주변 공기까지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 비웃던 안지훈 얼굴이 굳더니, 곧 분노가 폭발했다.
  • “미쳤어? 무슨 헛소리야!”
  • 안지훈은 내가 자극받아 정신이 나가서 자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왜, 겁나?”
  • 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노골적으로 도발했다.
  • “정말 죽을까 봐? 그래서 내가 호의호식할까 봐? 설마 네 금가영에 대한 사랑이, 그 정도 위험도 감수 못할 만큼 아무것도 아닌 거야?”
  • 정곡을 찔린 안지훈은 꼬리가 밟힌 고양이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 “지금 나 도발하는 거야? 유치해!”
  • 안지훈은 차갑게 웃었지만, 눈빛은 더 어두워졌다.
  • “그래, 이아린. 네 소원대로 해보자! 24시간 뒤에도 네가 계속 이렇게 웃을 수 있을지, 한번 보지 뭐.”
  • 말만 남긴 채, 안지훈은 서재로 걸어갔다.
  • 곧 서재 안에서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 막 찍혀 나온,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새 이혼 합의서를 들고 와 탕 하고 내 앞에 내려놨다.
  • “사인해!”
  •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펜을 들어, 서명란에 ‘이아린’이라고 적었다.
  • 펜을 내려놓고, 서류를 안지훈 쪽으로 밀었다.
  • “최대한 빨리 끝냈으면 좋겠어.”
  •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앞치마를 풀었다.
  • 소파 팔걸이에 대충 걸쳐놓고, 차분하게 말했다.
  • “안지훈, 네 바람대로 되길 바라. 어차피 네게 남은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 내 서명을 똑바로 바라보던 안지훈은, 협의서를 홱 낚아챘다.
  • 그리고 벌떡 일어나, 큰 체구로 마치 사람을 눌러버릴 듯한 기세를 내뿜으며 말했다.
  • “이아린, 오늘 네가 한 말, 똑똑히 기억해!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거야! 기억해 둬!”
  • 말을 남긴 채, 그는 서명한 협의서를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