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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 차진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는 울먹이는 민하나를 내팽개치고 내 곁으로 달려와 내 손목을 낚아챘다.
  • “임설아, 너 성격이 이 모양인데 앞으로 누가 너랑 결혼하겠다고 나서겠어?”
  • 그가 손목을 꽉 쥐는 바람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뿌리치고 뺨이라도 한 대 갈겨주려던 찰나, 내 손목을 뚫어지게 보던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이거… 이 상처 뭐야?”
  • 내 손목에 남은 흉측한 흉터를 발견한 차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 “칼에 베인 자국 같은데, 대체 언제….” “차진우 상무님. 네 약혼녀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데, 나한테 신경 쓸 여유가 있나 보네? 네 사람이나 잘 챙겨.”
  • 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밀쳐냈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민하나는 차진우의 팔을 붙잡으며 나를 경계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 나는 두 사람을 한심하게 훑어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 입구에는 사촌 오빠들이 밖을 내다보며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 오빠 임태준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급히 다가와 내 손을 끌었다.
  • “설아, 너 마침 잘 왔다! 아버지가 너 찾고 계셔.”
  •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내게 오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저택 외곽 도로를 가리켰다. 수십 대의 검은색 벤틀리가 길게 늘어서 있었고,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선회하며 금박으로 장식된 예물 상자들을 쉴 새 없이 실어 나르고 있었다.
  • 그 화려한 행렬을 따라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 산처럼 쌓인 물건들이 보였다. 최고급 한정판 주얼리, 별장 양도 계약서, 심지어 직인이 찍힌 주식 증여 서류들이 현금 수표 뭉치를 짓누르고 있었다.
  • “진우 씨, 이거 다 나를 위해 준비한 거예요?”
  • 뒤따라온 민하나의 비명 섞인 감탄사가 들렸다. 그녀는 눈을 번뜩이며 연회장을 가득 채운 보물들을 바라보았다.
  • “사랑해요, 진우 씨! 역시 나를 이렇게나 생각해주다니!”
  • 그녀는 차진우의 품에 안겨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탐욕으로 가득 찬 눈으로 값비싼 예물들을 훑는 꼴이 가관이었다. 언제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이 상황에서도 뻔뻔하게 자기 것이라 착각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났다.
  • 차진우는 천장까지 쌓인 예물 상자들을 보며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그는 민하나와 간소하게 식만 올릴 생각이었기에 이런 예물은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시장에서 이제 막 자리를 잡은 그에게는 이런 천문학적인 가치의 물건들을 동원할 능력이 없었다.
  • 이 바닥에서 헬기까지 띄워 예물을 보내고, 단숨에 조 단위 자산을 내던질 수 있는 남자는 단 한 명뿐이다.
  • TH 투자그룹의 후계자, 한주혁.
  • 그런데 그가 왜 JS 그룹 저택에 이런 것들을 보낸 거지? 이 정도 규모의 예물이라면, 설마….
  • 차진우는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며, 보석 상자로 향하던 민하나의 손을 거칠게 낚아챘다.
  • “이거… 내가 준비한 거 아니야.”
  • 민하나가 멍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해 표정이 일그러졌다.
  • “네? 저한테 준거 아니라고요?”
  • 차진우는 민하나의 표정에서 순간 낯선 이질감을 느꼈다. 평소의 천사 같던 여자가 저렇게 탐욕스럽고 실망 가득한 얼굴을 할 수 있다니. 민하나는 곧바로 제 실수를 깨달은 듯 차진우의 소매를 붙잡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 “아… 전 그냥 당신이 절 위해 무리해서 준비한 줄 알고 걱정돼서 그랬죠. 돈 버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니까요.” “그럼 혹시 회장님이 준비해 주신 거 아닐까요? 당신은 양아들이잖아요. 아들이 결혼한다는데 가만히 계실 분은 아니니까요. 안 그래요?”
  • 차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트 소매 아래 숨겨진 그의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졌다. 차진우가 뇌사 상태가 아니라면 알 것이다. 아버지가 그를 당장 길바닥으로 내쫓지 않은 것만으로도 수십 년의 정을 다한 것이라는걸. 감히 이 집안의 금지옥엽인 나를 차버린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터였다.
  • 분위기가 험악해지는데도 눈치 없는 민하나는 계속해서 캐물었다. “진우 씨, 회장님께 한번 확인해 봐요, 네?”
  • 그 멍청한 질문이 어처구니없어 나는 문가에 기대어 참아왔던 폭소를 터뜨렸다.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비웃음을 가득 담아 조롱했다.
  • “신데렐라라도 된 기분인가 봐, 하나 씨? 안타깝게도 네 약혼남은 왕자가 아니야. 지금의 차진우는 여기 있는 것들 중 가장 싼 것조차 살 능력이 없거든.”
  • 그때, 상공에서 거대한 굉음이 들려오더니 헬기의 프로펠러 바람이 연회장 커튼을 사정없이 휘저었다. 고개를 들자 천천히 하강하는 헬기 문이 열리고, 특유의 반항적인 기질이 흐르는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 한주혁이었다.
  • 그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외쳤다.
  • “임설아! 네 약혼자가 결혼 예물 들고 왔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해?” “부족하면 말만 해. 더 채워줄 테니까. 갖고 싶은 거 다 말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