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안 돼. 하나는 임신 중이야. 나 없이 이 바닥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전 직장 사람들에게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다른 조건은 다 들어줄게. 하지만 하나와 결혼하는 것만큼은 양보 못 해.” “설아, 기분이 안 좋은 건 알겠지만, 벌을 주든 욕을 하든 나한테만 해. 하나는 아무 죄도 없어. 그 사람은….”
나는 비릿한 실소를 터뜨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진우아, 농담 좀 해본 건데 너무 진지한 거 아냐?” “나 임설아가 언제부터 남이 버린 쓰레기에 욕심냈다고. 특히 너처럼 신의도 없는 물건은 쳐다만 봐도 눈이 오염되는 기분이라.”
내 직설적인 화법에 차진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는 결국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임설아, 5년이 지나도 여전히 제멋대로에 오만하구나.” “하나를 좀 본받아 봐. 배려심 있고 조신한 태도를 배워야지. JS 그룹의 배경이 없다면, 네 그 지랄맞은 성격을 받아줄 남자가 이 바닥에 한 명이라도 있을 것 같아? 누가 진심으로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하겠냐고.”
가당치도 않은 훈계질에 신물이 난 나는, 우리 둘의 이니셜이 새겨진 만년필을 집어 들고 차갑게 돌아섰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네가 판단할 자격은 아니야.”
창고를 빠져나와 정원 회랑을 걷던 중, 민하나와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으나, 이내 온화한 미소로 위장하며 다가왔다.
“설아 씨, 마침 감사 인사를 전하려던 참이었어요. 회장님이 마련해 주신 객실이 정말 근사하더라고요.”
내가 거리를 두려 한 걸음 물러서자, 그녀는 잽싸게 내 팔짱을 끼며 친한 척 굴었다.
“진우 씨랑 제가 어떻게 만났는지 얘기 안 하던가요?” “그이가 오지 시장에서 함정에 빠져 약이 든 술을 마셨던 날, 제가 우연히 발견해서 밤새 곁에서 간호했거든요….”
그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지만, 목소리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그 후에 제가 몰래 떠나려 했는데, 진우 씨가 제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더라고요. 반드시 책임지겠다고, 결혼하자고….”
수줍게 웃는 척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집요하게 내 손에 든 만년필을 향해 있었다. 도발적인 눈빛이었다.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으셨죠? 저희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에요. 진우 씨처럼 유능한 남자를 노리는 여자가 많다는 건 알지만, 이미 결혼 날짜까지 잡혔는데 눈치 없이 굴 사람은 없겠죠?” “JS 그룹은 가풍이 엄격하기로 유명하잖아요. 남의 약혼자를 탐내는 몰상식한 자식을 키웠을 리는 없겠죠. 안 그래요, 설아 씨?”
결국 돌고 돌아 나를 '남의 남자를 탐내는 여자'로 몰아가려는 속셈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어 주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만년필을 그대로 휘둘렀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만년필이 민하나 바로 옆 조각 난간에 박혔다. 펜촉이 나무 틈새로 깊숙이 박혀 파르르 떨렸다.
“너희가 어떻게 '우연히' 만났는지는 네 스스로가 제일 잘 알 텐데?”
민하나는 겁에 질려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그러다 멀리서 달려오는 차진우를 발견하자마자 눈빛에 생기가 돌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임설아! 진우 씨는 이제 내 남편이야! 그런데도 옛날 물건이나 들고 미련 떨면서 꼬시는 의도가 뭐야?” “진우 씨 마음엔 나밖에 없어! 당신을 조금이라도 아꼈다면 파혼 얘길 먼저 꺼냈겠어? 제발 현실 파악 좀 하고 포기해!”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손을 치켜들었다.
“수작 부려서 신분 세탁한 비서 나부랭이가, 감히 차진우가 널 평생 지켜줄 거라 믿는 거야?”
“임설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손목을 낚아챈 건 분노로 이글거리는 차진우였다. 나는 가차 없이 손을 뿌리치며 그를 쏘아붙였다.
“너,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본데 착각하지 마. 넌 그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수행비서였을 뿐이야. 우리 아버지 아니었으면 넌 지금쯤 길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거라고.” “네 여자 관리 잘해. 한 번만 더 내 귀를 더럽히면 그땐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
차진우는 내 일갈에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한참 뒤에야 바닥에 주저앉은 민하나를 내려다보았다. 민하나가 울먹이며 하소연하려던 찰나, 차진우는 난간에 박힌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그리고 묻은 먼지를 정성스럽게 닦아 내게 내밀었다.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 추측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나는, 독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민하나를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방으로나 데려가. 네 씨를 가졌다는데,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거 역겨우니까.”
두 걸음 정도 옮겼을까,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차진우를 응시했다.
“아, 그리고. 앞으로 나를 마주치면 꼬박꼬박 '아가씨'라고 예우해. 네 주제가 뭔지 잊지 말고.”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도 마. 불쾌하니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원 분수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만년필을 분수대 물속으로 던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