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심장이 멎은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 아버지는 나를 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더니,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셨다. 사흘 뒤는 내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날이자, 5년 전 우리가 약속했던 결혼식 날이었다. 식장은 그대로인데, 신부만 바뀌어 있었다.
- 차진우는 장내의 무거운 공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혼인 계약서를 챙기더니 민하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 “감사합니다, 회장님. 고마워요, 설아 씨.”
- 한참 뒤에야 정신이 돌아온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역겨운 애정 행각을 보고 싶지 않아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 “설아, 너 아까 왜 나를 말린 거야! 네가 개인적인 인맥까지 동원해서 뒤를 안 봐줬으면, 그 자식은 진작에 무너졌을 거라고!”
- 오빠이자 JS 그룹의 전무인 임태준이 울분을 토했다.
- “지난번에 창고에 갇혔을 때도 네가 경호원들 데리고 가서 구했잖아! 그때 팔을 다쳐서 지금도 펜 잡을 때마다 손이 떨리는데… 차진우 그 배은망덕한 놈은 어떻게 그걸 다 잊을 수가 있어!”
- “그놈 기다리느라 굴지의 대기업과 협업할 기회도 다 날리고, 네 커리어를 쌓을 황금기까지 놓쳤는데! 그 새끼가 감히 네 진심을 이렇게 짓밟아?!”
- 오빠는 당장이라도 차진우를 끌고 와서 패줄 기세로 씩씩거렸다. 과거 우리 관계가 알려졌을 때, 모두가 결사반대했었다. 당시 나는 명문대 MBA를 갓 마친 상태였고, 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도 있었다. 그 계약만 성사시켰다면 내 입지는 완벽했을 것이다.
- 하지만 나는 차진우를 위해 모든 기회를 내려놓고 오직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한 첫 번째 일이 파혼이라니.
-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티테이블 위에 쌓인 재벌가 자제들의 구애 편지와 협업 제안서들을 훑었다. 그러다 한 남자의 사진이 박힌 골드 카드를 집어 들었다.
- “아버지, 이 사람이에요. 저 이 사람이랑 결혼할래요.”
- 카드 속에는 야생마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오만하고 당당한 얼굴이 담겨 있었다. 오빠가 그 사진을 보더니 얼굴색이 변했다.
- “한주혁?”
- “안 돼, 설아! 그놈은 어릴 때부터 너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잖아. 사립학교 다닐 때 맨날 너 괴롭히고… 지금은 투자업계에서 미친개로 유명해. 아무도 못 건드리는 놈인데 네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 나는 오빠의 반대를 묵묵히 들으며 입을 닫았다. 아버지와 오빠도 내 고집을 아는지라 결국 침묵이 흘렀다.
- 기나긴 침묵 끝에 아버지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 “알았다….” 딸을 향한 측은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설아, 이번엔 네 뜻대로 하렴.”
- 나는 아버지의 피로한 얼굴을 보며 마음이 아려왔다. 아버지는 차진우를 해외로 보낸 게 결국 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것 같아 자책하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안다. 차진우가 진심으로 나와 결혼할 생각이었다면,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 그는 처음부터 확신이 없었던 것뿐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후회해 봤자 의미는 없다.
- 내 방 아래층 창고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차진우가 나타났다. 하인들이 오래된 상자를 밖으로 옮기는 걸 보더니 그는 멍하니 멈춰 섰다.
- “설아…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차갑게 상자를 훑었다. 학창 시절차진우 가 직접 만들어준 수제 키링, 우리의 첫 데이트 영화 티켓…. 지난 18년 동안 그가 내게 준 소소한 물건들이었다.
- 나는 태어날 때부터 보석과 명품이 넘쳐나는 삶을 살았다. 비싼 것들은 기분이 좋으면 하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지만, 그가 준 이 값어치 없는 물건들만은 창고 가장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해왔다.
- 내 진심을 그가 알아줄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착각이었다. 차진우의 눈에 나는 그저 ‘소중한 줄 모르는 철부지 아가씨’일 뿐이었다.
- “가지고 있었던 건 과거지. 지금은 눈에 거슬리니까 다 버리는 거야.”
-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상자로 뻗으려던 손이 공중에서 멈칫하더니 힘없이 떨어졌다.
- “설아, 이제 나이 먹을 만큼 먹었잖아. 좀 성숙해져.”
- 그 가당치도 않은 훈계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다. 자신이 나를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믿는 저 오만함. 그때는 사랑해서 참아준 거였는데.
- 이제 네가 대체 뭔데 나를 가르치려 들어?
- “진우 씨, 아버지가 당신이랑 민하나 씨 묵을 호텔 스위트룸 잡아주셨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 곁에 안 있고 여긴 왜 온 거야?”
- 내 빈정거림을 알아챈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잠시 후 등 뒤에서 만년필 한 자루를 꺼냈다.
- “설아, 너한테 미안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하나는 너랑 달라.”
- “너는 JS 그룹의 아가씨고, 늘 모두가 떠받들어 주잖아. 회장님과 태준 형님이 널 보호해 주지. 하지만 하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회사에서 늘 따돌림당했어. 내가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랑 똑같아. 지금 그 사람한테는 나밖에 없어.”
- “지난번에 오지 시장에서 함정에 빠졌을 때, 목숨 걸고 증거를 찾아다 준 것도 하나야.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어길 수 없어.”
- 나는 그 익숙한 만년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그건 내 18살 생일에 선물 받은 한정판 만년필이었다. 우리의 이니셜이 새겨진 징표이자, 그가 떠날 때 내가 가방에 몰래 넣어준 것이었다.
- 그때 그는 나를 안으며 약속했었다. 돌아와서 이 펜으로 우리의 혼인 신고서에 서명하겠다고. 평생 잘해주겠다고.
-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슬픔을 억누르며 그를 보았다.
- “그 여자와의 약속은 지켜야 하고, 나랑 한 약속은?” “민하나가 예전에 다녔던 회사가 우리 JS 그룹이랑 부정경쟁 벌였던 곳인 거 알잖아. 내가 제일 혐오하는 수법을 쓰던 곳인데, 기어이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와야겠어?”
- 차진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 “네가 몰라서 그래. 하나 같은 평범한 여자가 사회에서 살아남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내가 안 도와주면 그 사람은 갈 곳이 없어. 막다른 길로 내몰 순 없잖아.”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네가 용서해 준다면 뭐든 할게.”
- 그의 가증스러운 진심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은혜도 모르는 짐승 같은 놈. 도와줄 방법은 수만 가지였겠지만, 그는 가장 잔인하게 나를 난도질하는 방법을 택했다. 나와 결혼하기로 한 날에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까지 가졌다니.
- “뭐든 하겠다고?” 내가 물었다. “그래, 뭐든지.” 그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 일말의 기대감이 서렸다.
-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비웃어 주었다.
- “그럼 민하나를 여기서 치워. 내 눈앞에 평생 나타나지 않게 해. 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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