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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지 않는 약혼자에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약혼자에게

stephenwriter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세상 사람들에게 나는 강시완에게 미쳐 매달리는 구질구질한 호구였다.
  •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내가 지난 5년간 그의 그림자이자, 단 한 번도 태양 아래 서보지 못한 비밀스러운 여자친구였다는 걸.
  • 강시완의 생일 파티. 그와 소꿉친구인 임세나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나를 비꼬았다.
  • "아린아, 너 자꾸 그렇게 쫓아다니면 시완이도 질릴 텐데. 차라리 내가 괜찮은 남자 하나 소개시켜 줄까?"
  • 강시완은 임세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 "장난치지 마. 쟤 부끄러움 많이 타잖아."
  • "게다가 명색이 내 친동생 같은 앤데, 아무나 소개할 순 없지. 내가 아주 번듯한 놈으로 알아봐 줄게."
  • 나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며, 조용히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 "그럴 필요 없어. 나 다음 달에 결혼하거든."
  • ...
  • 화려했던 연회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적막이 내려앉았다.
  • 임세나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 샴페인 잔을 쥐고 있던 강시완의 손끝이 흠칫 떨리더니, 이내 서늘한 시선이 내게 꽂혔다.
  • "백아린, 방금 뭐라고 했어?"
  •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지극히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했어."
  •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 "백아린이 결혼을 해? 대체 누구랑?"
  • "설마 시완이 질투 유발하려고 아무나 들이미는 거 아냐?"
  • "5년이나 목매놓고 하루아침에 마음을 접는 게 말이 돼?"
  • 강시완의 미간이 좁혀지며, 늘 가면처럼 매달려 있던 오만한 여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녀석은 임세나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더니,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 "백아린. 장난치지 마."
  • 한껏 억눌린 음성에는 명백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 "할 말 있으면 집에 가서 해."
  • 집.
  • 지독하게도 익숙한 말이었다.
  • 지난 5년,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관계를 인정받고 싶어 안달 낼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았다.
  • "집에 가서 얘기해."
  • "밖에서 사람 피곤하게 굴지 마."
  • "넌 왜 이렇게 눈치가 없냐?"
  • 그리고 단둘이 남게 되면, 가벼운 입맞춤과 분위기 좋은 저녁 식사, 그리고 '그런 뜻이 아니었어'라는 달콤한 변명 한마디로 내 입을 막아버리곤 했다.
  • 그래놓고 다음이 되면, 보란 듯이 임세나를 끌어안고 나를 친동생 취급하는 짓을 밥 먹듯이 반복해 왔다.
  • 나는 그런 강시완을 똑바로 마주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 "장난치는 거 아니야."
  • "다음 달 28일. 청첩장도 이미 돌렸어."
  • "참석하고 싶으면 언제든 환영이야. 와서 샴페인이라도 한잔하면서 축하해 주든가."
  • 강시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 나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그의 눈빛에는 짙은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 "백아린. 너 지금 대체 뭐하자는 거야?"
  • "사람들 앞에서 네가 내 약혼녀라는 걸 인정이라도 해 달라는 거야?"
  • "이런 문제는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내가 수십 번은 말했지—"
  • "강시완 씨."
  • 나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라냈다.
  • 내가 그에게 이렇게 선을 그어 부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시완아'도 아니고, 애정 섞인 호칭도 아닌.
  • 완벽한 타인을 부르는 듯한 '강시완 씨'.
  • 순간, 그의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리며 굳어버렸다.
  • 나는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 "내 약혼자는 권도현이야. 시완 씨도 익히 들어봤을 텐데. 권성그룹의 권도현."
  • "워낙 바쁘신 분이긴 하지만, 우리 결혼 준비만큼은 직접 챙기겠다고 하시더라고."
  • "그러니 시완 씨가 굳이 내 짝을 알아봐 줄 필요는 없어."
  • "이미 완벽한 사람이 내 곁에 있으니까."
  • '권성그룹'이라는 단어가 떨어지자마자, 연회장 안은 폭발할 듯한 웅성거림으로 뒤덮였다.
  • 강시완은 발이 묶인 사람처럼 제자리에 선 채,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흉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클러치백을 집어 들었다.
  • "생일 축하해, 강시완."
  • "이만 가볼게."
  •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막 두 걸음쯤 뗐을 때, 등 뒤에서 임세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아린아, 벌써 가게?"
  •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은 얄미운 얼굴에는 가증스럽게 순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네가 말한 그 엄청난 약혼자 말이야, 우리는 코빼기도 못 봤는데?"
  • "진짜 시완이 질투 유발하려고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인 건 아니지?"
  • 내 곁으로 바짝 다가온 임세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마치 세상 둘도 없는 절친에게 속삭이듯 친근한 척 연기를 시작했다.
  • "아린 언니, 나 언니 마음 다 이해해. 진심이야."
  • "시완이가 워낙 무심한 구석이 있잖아. 언니가 그렇게 목을 매는데도 끄떡없으니, 솔직히 누구라도 홧김에 사고 칠 만하지."
  • "그렇다고 평생이 달린 결혼을 홧김에 저질러서야 되겠어?"
  • "이상한 놈한테 시집갔다가 인생 망치면 어쩌려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