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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성녀의 가면

  • 진우는 김유리를 침대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 내가 가장 아끼던 실크 이불을 덮어준 뒤, 침대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 “무서워하지 마. 내가 옆에 있을게.”
  • 똑같은 말, 똑같은 어조.
  • 달라진 건 장소뿐이었다. 손님방에서, 이제는 우리의 침대로.
  • 나는 문틈 사이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위장이 뒤틀리고 장기 하나하나가 불에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내 남편이, 내 침대 위에서 다른 여자를 달래 잠재우고 있었다.
  • 김유리는 가냘픈 몸짓으로 진우의 품바구니 파고들었다. 조금 전 발작을 연기하며 찢어놓은 슬립 사이로 그녀의 하얀 가슴이 노출되었다. 진우는 당황하며 옷을 끌어 올리려 했지만, 유리가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 “유리야, 이건 좀…….”
  • “무서워요!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옆에 있어 줘요!”
  • 진우은 못 이기는 척 김유리의 몸 위로 엎드려 겹쳐 누웠다.
  • “괜찮아..유리야 내가 지켜줄게.”
  • 두 육체가 빈틈없이 맞닿았다. 나는 이 역겨운 연극을 무표정하게 끝까지 지켜볼 만큼 강한 정신력을 갖지 못했다.
  •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려 거실 소파에 앉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공포에 질린 비명은 어느새 끈적한 신음으로 변해갔다. 예상대로였다.
  • 그날 밤, 나는 거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다음 날 아침, 침실에서 나온 진우는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내 발치에 ‘퍽’ 소리가 나게 무릎을 꿇고는 내 다리를 붙잡았다.
  • 찰싹! 찰싹! 찰싹!
  • 그는 양손을 들어 제 뺨을 사정없이 갈기기 시작했다. 정확히 서른 대. 단 한 대도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터진 입술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고, 눈물과 피가 뒤섞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 “서윤아,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난 쓰레기야! 차라리 날 때려, 제발!”
  • 진우는 아이처럼 울부짖으며 참회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면은 마치 고인 물처럼 아무런 파동도 일지 않았다. 진우가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의 티슈를 뽑아 그에게 건넸다.
  • “그만해. 바닥 더러워져.”
  • 내 낮은 목소리에 진우의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그는 충격과 의아함이 섞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허리를 숙여 진우의 입가에 묻은 피를 살포시 닦아주었다.
  • “이해해. 생명의 은인인데,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갚아야지.”
  • 두 달 뒤.
  • 예상했던 대로 김유리는 임신했다. 배가 살짝 부풀어 올라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 진우는 다시 내 발 앞에 엎드렸다. 이번에는 자학하지 않았다. 대신 집안의 모든 카드와 통장, 부동산 서류를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 “서윤아, 나 사람이 아닌 거 알아.”
  • 그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고개를 깊숙이 처박았다.
  • “그런데 유리가…… 정신 상태가 너무 불안정해서 의사가 더 이상 자극을 주면 안 된대. 이 아이는…… 내 책임이야.”
  • 책임. 또 그놈의 책임.
  • 나는 이 남자가 자신의 파렴치함을 포장하기 위해 얼마나 고결한 단어를 골라 쓰는지 감탄했다.
  • “그래서?”
  • “너 심리학 석사잖아. 이제 곧 자격증도 받아고.”
  • 그가 미친 듯한 간절함을 담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 “유리를 첫 번째 환자로 받아주면 안 될까? 부탁해, 서윤아. 그 애도 살리고, 나도 좀 살려줘.”
  • 조강지처인 내게 임신한 내연녀를 ‘치료’해달라니.
  • 이 얼마나 경이로운 비극인가. 나는 테이블 위의 서류들과 무릎 꿇은 남자를 번갈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 “그래, 좋아.”
  •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 “진우아, 걱정 마. 유리가 내 가장 소중한 환자로 대할게.”
  • 이진우의 눈이 경이로움으로 커졌다. 그는 나를 구원자라도 만난 듯 꽉 껴안았다.
  • “고마워, 서윤아. 네 선량함 잊지 않을게. 평생 보답하며 살게…….”
  • 이진우의 품에 안긴 채, 내 시선은 그의 어깨 너머 손님방 문틈을 향했다. 그곳에서 김유리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 나는 그녀를 향해 더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로 화답했다.
  • 그날부터 나는 ‘성녀’ 같은 아내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서재를 전문 심리 상담실로 개조하고, 편안한 소파와 아로마 향초, 잔잔한 음악을 채워 넣었다. 매일 김유리를 위한 임산부 영양 식단을 직접 짜서 먹였다. 심지어 우리 부부의 침대 시트까지 김유리가 좋아할 만한 부드러운 소재로 직접 갈아주었다.
  • 이진우는 처음엔 내 의도를 의심하는 듯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진심으로 헌신한다고 믿게 되었다.
  • 특히 내가 밤늦게까지 김유리의 차트를 정리하고 치료 플랜을 짜는 모습을 보며, 그의 죄책감은 절정에 달했다.
  • 자신들이 파괴한 가정의 주인에게 치료받는 기분은 어떨까.
  • 진정한 치료는 이제부터 시작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