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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사냥의 시작

  • 이진우는 내 말을 잘 듣기 시작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숭배와 감사가 가득했다. 동시에 김유리의 기세도 정점에 달했다. 그녀는 나의 ‘간병’을 당연한 권리인 양 누렸고, 마치 이 집의 여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나는 다른 일을 꾸미고 있었다.
  • 상담실의 장식품 사이, 거실의 액자 뒤, 심지어 그들이 붙어먹는 안방의 침대 스탠드 안에도 핀홀 카메라와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 빛도 소리도 나지 않는 아주 작은 것들로. 나처럼 조용하고 평온하게, 하지만 모든 것을 기록하도록.
  • 그다음, 나는 아주 오래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성민 선배, 저예요. 서윤이.”
  • 수신음 끝에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부드럽고 지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서윤아? 정말 오랜만이네.”
  • “선배…… 제가 가상 사례를 하나 분석 중인데, 조언을 좀 구하고 싶어서요.”
  • 나는 가장 냉정한 어조로 진우와 유리의 이야기를 친구의 일인 것처럼 꾸며 국내 최고의 심리학 교수인 박성민에게 털어놓았다. 성민 선배는 묵묵히 듣더니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 “이건 치료가 아니라 설계네. 서윤아, 넌 전문적인 ‘역심리 치료(Reverse-Psychotherapy)’ 플랜이 필요해.”
  • “선배, 저는…….”
  •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 역시 그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거울 속 여자는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입가에는 세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김유리의 배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 “걱정 마. 앞으로 유리랑 아기, 언니가 정말 잘 ‘보살펴’ 줄게.”
  • 김유리는 내 손길을 즐기며 경멸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김유리가 보지 못하는 곳, 내 상담 일지의 첫 줄에 이렇게 적혀 있다는 것을.
  • [사냥 시작.]
  • ‘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김유리를 위해 내디딘 첫걸음은 ‘절대적인 신뢰’를 쌓는 것이었다.
  • 나는 화재 사건이라는 핵심 트라우마를 서둘러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유년 시절 불안감부터 파고들었다. 부모의 이혼, 친척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도록 유도했다. 공감과 경청을 무기로 그녀의 경계심을 무너뜨렸고, 마침내 그녀가 나를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으로 믿게 만들었다.
  • “서윤 언니도 참 힘들게 살았네요.”
  • 상담 의자에 기댄 김유리가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말했다.
  • “다른 사람들은 다 내가 예민한 거래요. 언니만 내 마음을 알아주네.”
  • 나는 미소 지으며 티슈를 건넸다.
  • “알지. 우리는 닮은 점이 많으니까.”
  • 성민 선배의 지도 아래, 나는 치료 과정에 ‘최면’ 요소를 도입했다. 은색 회중시계를 그녀의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내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더 낮고 완만하게 흘러갔다.
  • “유리야, 힘을 빼고…….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고 생각해……. 떠오르는 거야…….”
  • 유리의 호흡이 평온해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 “이제 우리는 안전한 곳에 왔어. 너와 나만 있는 곳. 여기서 너는 어떤 비밀이든 말할 수 있고, 나는 영원히 그 비밀을 지켜줄 거야…….”
  • 몇 차례의 얕은 최면 끝에, 나는 그녀의 잠재의식 깊은 곳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 “우리 게임 하나 할까? 그날로 돌아가 보는 거야. 불이 나기 바로 직전으로.”
  • 최면 상태의 김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그날…… 너무 더웠어요……. 팀장님이 군장 메고 훈련하라고…… 하기 싫었는데…….”
  • 그녀의 목소리가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 “못 뛰겠어……. 애들이 비웃을 텐데……. 진우 오빠는 항상 나만 도와주니까…….”
  • 내 심박수가 빨라졌지만 목소리는 평온을 유지했다.
  • “그래서? 그다음엔 뭘 했니?”
  • 김유리의 호흡이 급해졌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의 잠재의식은 그날의 진실을 뱉어내는 것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자신을 돌봐주는 서윤’에게 의지하고 싶은 욕망이 승리했다.
  • 그녀가 눈을 감은 채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 “봤어요……. 낡은 창고……. 배전반……. 엄청 오래된 거…….”
  • “난 그냥…… 훈련을 멈추게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불이 날 줄은 정말 몰랐어…….”
  •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