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강태준도 더는 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 그는 내 턱을 놓고 휠체어를 뒤로 조금 물렸다.
- 표정은 다시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됐어. 지난 일은 더 말해 봐야 의미 없어.”
- 목소리엔 감정이 한 점도 실려 있지 않았다.
- 조금 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사람이 정말 그였나 싶을 정도였다.
- “오늘 네 남편이... 널 여기까지 데려다 놨는데... 왜 그랬는지 너도 알고 있겠지.”
- 그는 말을 끊고 시선을 내 몸 위로 천천히 떨어뜨렸다.
- 마치 물건을 훑어보듯 차갑고 건조한 눈빛이었다.
- “저렇게 공을 들였는데, 내가 실망시키면 안되겠지?”
- 가슴이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 무슨 뜻이야, 이게.
- 분명 나를 미워하면서, 그런데도……
- 복수하려는 건가?
- 이렇게까지 최악인 방식으로, 내가 자길 배신했다고 믿고 앙갚음하겠다는 거야?
- 몸속에 남아 있던 약기운은 여전히 들끓고 있었다.
- 뼛속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훅훅 치밀어 올랐다.
- 나는 강태준을 바라봤다.
- 그의 눈동자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스르르 꺼져 가는 것 같았다.
- “강태준.”
- 나는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 “5년 만에 다시 봐도 여전하네. 자신감 하나는. 내가 네 뜻대로 움직일 거라는 확신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 그는 미간을 아주 미세하게 치켜올렸다.
- 내 반항이 의외로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 “어디서 나온 거라고?”
- 그가 낮게 되물었다.
- “네가 지금 여기 이렇게 누워 있고, 네 남편은 밖에서 내가 줄 좋은 소식만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 그는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 곧바로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 잠시 뒤, 반대편에서 이도현의 비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회장님, 마음에 드십니까?”
- 강태준은 시선을 한 번도 내게서 떼지 않았다.
- 얇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 “사람은 꽤 마음에 들어. 그런데……”
- 일부러 끝을 길게 늘였다.
- 전화기 너머의 이도현은 숨소리마저 조급해졌다.
- “그런데 뭡니까? 회장님, 원하시는 게 있으면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 “본인은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거든.”
- 강태준의 목소리엔 비틀린 여유가 아주 옅게 배어 있었다.
- “도현 씨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 이도현이 몇 초간 침묵했다.
- 그리고 이내, 살갗이 서늘해질 만큼 냉정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 “회장님, 신경 안 쓰셔도 되십니다. 그냥 여자일 뿐인데, 달래면 넘어갈 거고…… 안 그러면 좀 세게 나가시면... 금방 말 들을 겁니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 회장님 기분 내키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 통화가 끊기자, 강태준은 휴대폰을 툭 소리 나게 옆으로 던져 버렸다.
- 방 안은 순식간에 무덤처럼 고요해졌다.
- 나는 그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저게 내가 결혼한 남자였다.
- 한때는 평생을 맡겨도 된다고 믿었던 사람.
- 제 욕심을 위해, 그는 내 등을 제 손으로 지옥 속에 떠밀었다.
- 심지어 힘으로라도 굴복시키라고 서슴없이 부추기기까지 했다.
- 가슴이 아파 숨이 막혔다.
- 강태준은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 그의 눈동자엔 아까보다 훨씬 더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 한참 만에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 뜻밖에도 그 목소리엔 피로가 어려 있었다.
- “윤서아, 넌 결국 저런 남자 때문에 나를 버린 거야?”
- 그 밤, 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강태준은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 그저 침대 옆 소파에 앉아 밤새 말없이 나만 바라봤다.
- 나는 약기운과 뒤엉킨 감정에 휘둘리다 못해,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겨우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
- 눈을 뜨자, 내 위로는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고 강태준은 방 안에 없었다.
- 공기 속엔 아직 옅은 전나무 향이 남아 있었다.
- 몸을 일으키는 순간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
- 어젯밤의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이도현의 배신.
- 강태준의 등장.
-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오해까지.
- 가슴 한복판이 엉킨 채로 저릿저릿 아파 왔다.
- 초인종은 집요하게 계속 울렸다.
-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이불을 젖혔다.
-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 나는 벽을 짚고 한 발 한 발 간신히 문 앞으로 갔다.
- 도어 아이홀에 눈을 갖다 대고 밖을 들여다봤다.
- 이도현이었다.
- 새 양복에 머리까지 반듯하게 넘긴 채, 손엔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 얼굴엔 감출 수 없는 득의와 기대가 가득 번져 있었다.
- 속이 울렁거렸다.
-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 이도현은 초조해졌는지 곧장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윤서아, 문 열어! 안에 있는 거 알아!”
- 바로 그때, 욕실 문이 열렸다.
- 강태준이 휠체어를 몰고 밖으로 나왔다.
-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는 아직 물기가 남아 축축했다.
- 어젯밤 보이던 날 선 기세는 한결 가라앉아 있었고, 대신 훨씬 낯선 부드러움이 배어 있었다.
- 그가 나를 한 번 보더니 담담하게 물었다.
- “누구야?”
- “이도현.”
- 나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 그는 알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내 휠체어를 내 옆까지 몰고 오더니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 문밖의 이도현은 또다시 문을 두드리려다, 문을 연 사람이 강태준이라는 걸 보자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 얼굴에 걸린 표정은 순식간에 다급함에서 납작 엎드린 미소로 바뀌었다.
- “회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저…… 윤서아 데리러 왔습니다.”
-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강태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넘겨 내게 꽂았다.
- 내가 멀쩡한 데다, 심지어 옷도 어젯밤 그대로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의 눈빛에 감추기 힘든 의문과 실망이 스쳤다.
- 강태준은 그를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이도현이 듣기엔 충분할 만큼 또렷했다.
- “신발은?”
-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 맨발이었다.
-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강태준은 현관 신발장 쪽으로 손을 뻗어 새 여자 슬리퍼 한 켤레를 꺼냈다.
- 그는 허리를 숙여 슬리퍼를 내 발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 토 달지 말라는 기색이 목소리에 옅게 배어 있었다.
- “신어.”
- 나는 홀린 사람처럼 순순히 발을 밀어 넣었다.
- 부드러운 감촉이 발을 감싸는 순간, 얼어붙어 있던 가슴 한구석까지 아주 조금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 문가에 서 있던 이도현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 얼굴에 걸친 웃음은 딱딱하게 얼어붙었고, 눈빛엔 충격과 불신이 가득했다.
- “회장님, 이게……”
- 강태준이 천천히 상체를 폈다.
- 얼음물 같은 시선이 이도현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 “어젯밤의 선물.”
- 그가 낮고 또렷하게 말했다.
- “아주 마음에 들었어.”
- 그 말을 듣자 이도현의 굳어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풀렸다.
- 얼굴엔 다시 비굴한 웃음이 덕지덕지 올라왔다.
- “이렇게 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회장님. 그럼 제 계약서는……”
- 그는 마치 공이라도 세운 사람처럼 서류 봉투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 강태준은 받지 않았다.
- 그저 차갑게 이도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 입꼬리는 서늘하게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 “보답으로.”
-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내뱉었다.
-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말은 망치처럼 이도현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 “네가 어떻게 모든 걸 잃는지... 직접 눈으로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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