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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시간은 초를 단위로 기어갔다.
  • 매 순간이 한 세기처럼 길었다.
  • 숨이 막힐 듯한 침묵에 미쳐 버리기 직전, 마침내 그가 움직였다.
  • 그가 손을 뻗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끝이 천천히 내 뺨을 쓸고 지나갔다.
  • 온몸이 굳었다.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그가 내 턱을 움켜쥐었다.
  • 손끝은 거칠었다. 얇은 굳은살이 배어 있었다.
  • 그 손가락이 살짝 문질러지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 나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 그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 어스레한 불빛 아래서야,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 이목구비는 선명했다.
  • 높게 뻗은 콧대와 단단히 다문 얇은 입술.
  • 그리고 옅은 흉터 하나가 눈썹뼈에서 눈꼬리까지 길게 그어져 있었다.
  • 그 흉터 때문인지, 그는 훨씬 더 사납고 어두워 보였다.
  • 이 얼굴……
  •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기억 깊숙이 묻어 둔 이름 하나가 멋대로 튀어나왔다.
  • 설마.
  • 말도 안 돼.
  • 죽었잖아.
  • 5년 전, 그 화재 속에서.
  • 날 구하려다 무너져 내리는 들보에 맞았고, 그 뒤로는……
  • 내가 술에 너무 취해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거였다.
  • 나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 통증으로라도 정신을 붙잡으려 했다.
  • 어둠 속에서 그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 점점 더 가까워졌다.
  • 익숙한 전나무 향이 코끝을 파고드는 순간, 내가 가까스로 쌓아 올린 방어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서아야.”
  • 그가 입을 열었다.
  • 쉰 목소리였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드디어 돌아왔네.”
  • 쾅.
  • 내 세상이 통째로 뒤집혔다.
  • 이 목소리.
  • 이 얼굴.
  • 이 냄새.
  • 더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 내 앞에 있는 남자.
  • 그는 강태준이었다.
  • 내가 가장 어두웠던 시절, 태양처럼 내 청춘을 환하게 비춰 주던 소년.
  • 5년 전, 나를 구하려다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고 믿었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나를 죄책감에 짓눌리게 만든 사람.
  • 그가 죽지 않았다고?
  • 아직 살아 있다고?
  • 충격과 벅찬 기쁨이 한꺼번에 밀려와 이성을 휩쓸었다.
  •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 “강태준…?”
  • 나는 숨 섞인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 그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 내 턱을 붙잡은 손에 힘이 확 들어갔다.
  • “날 기억하긴 하네?”
  • 그의 목소리엔 내가 차마 다 읽어 낼 수 없는 비웃음과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 “당... 당연히 기억하지.”
  • “기억한다고?”
  • 그가 싸늘하게 웃었다.
  • 손끝은 아까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 “그렇게 기억해서 5년 동안 코빼기도 안 비쳤어? 그렇게 기억해서 다른 남자랑 결혼까지 했고? 윤서아, 네 기억이란 것도 참 가볍네.”
  • 그의 말은 얼음이 박힌 칼처럼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때 분명 그는……
  • 나는 입을 벌렸다. 설명하려 했다.
  • 하지만 목구멍에 솜뭉치가 틀어박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 5년 전의 화재 현장이 다시 눈앞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 치솟는 불길.
  • 몰아치는 검은 연기.
  • 그리고 나를 불길 밖으로 밀쳐 내며,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 한마디.
  • “어서 가!”
  • 눈앞에서 떨어지는 들보에 그가 삼켜지는 걸 봤다.
  • 그 순간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 그 뒤로 가족들이 병원에 있던 나를 데려갔다.
  • 그들은 말했다. 강태준은 사망이 확인됐고,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 그들은 나를 그 도시에서 데리고 나왔다.
  •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 나는 크게 앓아누웠다.
  • 반년이 지나서야 겨우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 나는 그가 죽었다고 믿었다.
  •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 강태준은 죽었다고.
  • 그런데 지금, 그는 살아서 내 앞에 있었다.
  • 원수라도 보듯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 “아니야……”
  •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눈물이 번져 시야가 흐려졌다.
  • “사람들이 그랬어. 네가 이미……”
  • “죽었다고?”
  • 내가 끝내 입에 담지 못한 말을 그가 대신 내뱉었다.
  • 그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비틀렸다.
  • “차라리 내가 진짜 죽었으면 좋았겠지. 그랬으면 네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꼴도 안 봤을 테고, 네가 날 그렇게 깨끗하게 잊어버렸다는 사실도 몰랐을 테니까.”
  •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살을 에듯 파고들었다.
  • 흘러넘치는 증오가 피부 위로 그대로 와 닿았다.
  • 그의 눈빛은 나를 향한 미움으로 서늘하게 얼어 있었다.
  • 그의 눈엔, 그날 내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자라는 확신이 박혀 있었다.
  • 하지만 아니었다.
  • 나는 정말로 그가 살아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
  • 이건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 “태준아, 내 말 좀 들어. 내가 설명할게……”
  • “설명?”
  • 그가 내 말을 잘라냈다.
  • 눈빛이 한층 더 싸늘하게 식었다.
  • “그래. 한번 들어보지.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넌 어떻게 그렇게 멀쩡히 다른 데로 떠나 버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겨우 몇 년 만에 어떻게 내 밑에서 일하던 직원이랑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
  • 그의 말투엔 노골적인 조롱이 배어 있었다.
  • 마치 내가 돌이킬 수 없는 배신자라도 되는 것처럼.
  • 나는 말문이 막혔다.
  • 그래.
  • 대체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 가족들에게 속았다고?
  • 그가 죽었다고 철석같이 믿은 채, 내 곁을 맴돌며 온갖 친절을 베풀던 이도현과 정신없이 결혼해 버렸다고?
  •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들이 얼마나 궁색하게 들릴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 그가 믿어 줄 리 없었다.
  • 지금 그의 눈에 나는, 제 목숨만 챙기고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갈아타는 여자일 뿐일 테니까.
  • 절망이 밀물처럼 밀려와, 끝내 나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