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정우가 매서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시선은 살얼음판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강소리는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입술을 질근 깨물고 나를 독기 어린 눈으로 한 번 흘겨보더니, 이내 홱 뒤돌아 뛰쳐나갔다.
- 거실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지만, 공기 중에는 숨통을 조이는 듯한 묘한 압박감이 질척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 나는 묵묵히 정우를 올려다보며,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 그는 한참이나 짙은 침묵을 지키다, 이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 "서원아, 미안해. 많이 놀랐지."
- "방금 한 말… 혼약이라는 거, 진짜야?"
- "비즈니스 차원의 정략결혼이었고, 파혼한 지 오래야."
-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 "두 집안 사이에 얽힌 원한이 좀 복잡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야."
- 그는 이렇듯 늘 내 말문을 턱 막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가장 잔인하게 선을 그으며 나를 자신의 세계 밖으로 철저히 밀어내곤 했다.
- 그날 밤, 나는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
- 꿈속에서 나는 다시 그 끔찍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고, 가면을 쓴 악마의 실루엣과 정우의 서늘한 얼굴이 기괴하게 끊임없이 겹쳐졌다.
- 가죽 벨트를 무자비하게 휘두르던 그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 "지아야. 도대체 어디까지 도망치려고 그래?"
-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온몸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정우는 사시나무처럼 떠는 나를 꽉 끌어안고,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몇 번이고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 "괜찮아. 그냥 꿈일 뿐이야."
-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그건 단순한 개꿈이 아니라는 걸.
- 억눌려 있던 내 무의식이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려대고 있었다.
- 나는 그때부터 숨죽인 채 김정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 그의 서재 안쪽에는 늘 굳게 잠겨 있는 비밀의 방이 하나 있었다.
- 그리고 매일 밤 내가 잠든 후면, 그는 몰래 테라스로 나가 누군가와 길게 통화를 나눴다.
- 심지어, 그의 서랍장 구석에서 내 몸에 새겨진 것과 완전히 똑같은 '치자꽃 문양'의 타투 스티커를 발견하기까지 했다.
- 그 문신은 그 악마 새끼가 내 허리춤 가장 은밀한 곳에 억지로 새겨 넣은, 지독한 소유의 낙인이었다.
- 살갗을 파고드는 고통 속에서, 그가 속삭였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 "지아, 이제부터 넌 온전히 내 거야."
- 나와 그 악마 말고는,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표식.
- 그런데 김정우가 대체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단 말인가?
- 꼬리에 꼬리를 무는 끔찍한 의혹들이 거대한 거미줄처럼 나를 옥죄어 와,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 나는 가만히 앉아 말라 죽느니, 먼저 판을 흔들기로 결심했다.
-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도진 척 집 안의 모든 집기를 미친 듯이 때려 부수며, 당장 주치의인 박서준을 불러 달라고 발악했다.
- 김정우도 나의 이런 난동에는 두 손 두 발을 들었는지, 결국 박서준을 집으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감시하는 정우 탓에, 박서준과 단둘이 대화를 나눌 틈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 나는 작별 포옹을 하는 찰나의 순간을 노려, '살려주세요'라고 적어둔 쪽지를 그의 옷 주머니에 재빠르게 쑤셔 넣었다.
- 순간 박서준의 몸이 흠칫 굳어졌지만, 그는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내 등을 다독여 주었다.
- 그러나 박서준이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김정우의 얼굴에 걸려 있던 그 다정한 가면이 산산조각 났다.
- 그가 억센 손아귀로 내 턱을 틀어쥐었다. 금방이라도 턱뼈가 으스러질 듯 무자비한 악력이었다.
- "서원아. 넌, 그렇게 날 떠나고 싶어?"
- 그의 눈빛은 소름이 끼치도록 서늘했다. 마치 주인의 명을 거역한 애완동물을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 고통에 못 이겨 생리적인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나는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절대 살려달라 애원하지 않았다.
- "김정우. 너… 정체가 대체 뭐야."
- 남자가 나른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낮게 긁는 듯한 음울하고 기괴한 웃음소리였다.
- "내가 누구냐고? 네 평생을 함께할 남편이자, 네 삶의 유일한 구원자. 아니야?"
- 그가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놓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녹음기를 꺼내 들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 기계음과 함께, 방금 전 나와 박서준이 나눴던 은밀한 대화가 흘러나왔다.
- [선생님, 그 사람 제정신이 아니에요. 지아라는 이름도 알고, 제 몸에 있는 타투도 알고 있다고요!]
- [서원 씨, 과도한 스트레스 탓에 예민해지신 겁니다. 그건 원활한 치료를 돕기 위해 제가 정우 씨에게 미리 귀띔해 둔 정보들입니다.]
- 녹음기 너머로 들려오는 박서준의 무미건조한 음성.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육중한 쇠망치가 되어 내 뒤통수를 무참히 후려갈기는 듯했다.
- 아아, 이 얼마나 멍청하고 우스운 촌극인가. 박서준 그 새끼마저 김정우의 수족이라는 걸 왜 진작 의심하지 못했을까. 스스로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며 살려달라 울부짖은 꼴이라니.
- "서원아. 내가 말했잖아. 네 세상에는, 나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고."
- "대체 왜…?"
- 나는 벼랑 끝에 몰린 절망적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내가 대체 당신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 남자는 천천히 다가와 뺨 위로 흐른 눈물을 긴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훔쳐내었다. 손길은 한없이 다정했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시리도록 잔혹했다.
- "서원아, 넌 내게 아무런 죄가 없어."
- "네 아버지, 이재윤. 그 인간이 죽어 마땅한 짓을 한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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