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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정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 "지아야, 마음에 안 들어? 박서준 선생님한테 들었거든. 완전히 새로운 애칭을 쓰면 과거와 이별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 박서준은 내 심리치료사였다. 그 지옥의 악마를 제외한다면 '지아'라는 이름의 존재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머리로는 납득할 수 있는 그럴싸한 변명이었지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한기가 덩굴처럼 미친 듯이 뻗어나갔다.
  • 김정우를 알게 된 지 벌써 두 달.
  • 그는 단 두 달 만에 나를 그 지옥불에서 끄집어내어, 온전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었다.
  • 내 삶의 유일한 구원.
  • 그런 그를 의심해선 안 된다.
  • 내가 미친 게 틀림없다. 또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힌 거다.
  • 나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겨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이 모든 공포와 불안을 예고 없이 찾아온 정전 탓으로 돌려버렸다.
  • 정우는 나를 부서져라 꽉 끌어안은 채 정수리에 턱을 묻었다. 꿀이 뚝뚝 떨어질 듯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 "괜찮아, 우리 아가. 다 지나갔어. 앞으론 내가 지켜줄게."
  • 하지만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비릿하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 다음 날, 정우는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하는 자리에 나를 데려갔다.
  • 무리 중 가장 눈에 띄는 남자는 강지훈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길들여지지 않은 날티가 줄줄 흐르는 사내였다.
  • 나를 훑어보는 그의 시선에는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 그가 내게 술잔을 건네며 능글맞게 웃었다.
  • "서원 씨는 참 운도 좋네. 김정우가 여자 데리고 모임에 나온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거든."
  • 무의식적으로 거절하려던 찰나, 정우가 내 몫의 잔을 대신 가로채며 선을 그었다.
  • "서원이는 술 입에도 못 대."
  • 잔을 대충 테이블 구석에 내려놓은 그는, 일행이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내 이마 위로 흘러내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 손길이 너무나 다정하고 자연스러웠다.
  •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여자친구, 서원이야."
  • 순간 강지훈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더니, 이내 다시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 "김정우, 너 진짜 진심이냐?"
  • "당연하지."
  • 정우는 내 손을 꽉 쥐어 깍지를 끼며 쐐기를 박았다.
  • "서원이는 나랑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니까."
  • 주변에서 부러움이 섞인 요란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평생'이라는 달콤한 맹세에 홀려버린 나는 마음속에 도사리던 마지막 의심의 씨앗마저 미련 없이 날려 보냈다.
  • 오직 강지훈만이 모두의 축하 소리 속에서 나를 연민하듯 바라보다가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 그날 밤, 나는 분위기에 취해 술을 꽤 마셨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질어질했다.
  • 차 안을 채운 적막을 깨고, 정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 "서원아, 강지훈 어때 보여?"
  •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 흐릿한 정신으로 중얼거렸다.
  • "글쎄…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 정우가 나직하게 실소를 터뜨리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신경 쓰지 마. 원래부터 그 모양이었어. 진지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새끼니까."
  • 차창 밖으로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스쳐 지나가고, 수려한 그의 옆얼굴에 내려앉은 그림자는 속을 알 수 없이 서늘하고 어두웠다.
  • 정우와의 동거 생활은 고인 물처럼 지독하게 평온했다.
  • 그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뜰히 보살폈다. 마치 귀한 카나리아를 기르듯, 숨 막히게 화려하지만 텅 빈 새장을 내게 지어주었다.
  • 집 안의 고용인들을 모조리 내쫓은 것도 모자라, 내 끼니와 옷가지 하나하나까지 손수 챙기며 통제했다.
  • 그는 매번 다정하게 속삭였다. "서원아. 네 세상에는, 나 하나만 있으면 돼."
  • 내 휴대폰과 컴퓨터도 전부 그가 바꿔주었다. 바깥세상의 악의를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 내 인간관계는 처참할 정도로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 내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세계는 오직 김정우, 그 남자뿐이었다.
  • 처음에는 그 숨 막히는 애정에 기꺼이 익사할 듯 빠져들어, 그를 내 전부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강소리라는 여자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그날 전까지는.
  • 최신상 샤넬 투피스를 빼입고 완벽하게 세팅된 얼굴을 한 여자는, 길가에 나뒹구는 쓰레기라도 보듯 나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김정우. 네가 결혼하겠다고 싸고도는 여자가 고작 이… 미친년이야?"
  •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부풀어 있던 내 거짓된 행복의 거품을 가차 없이 터뜨렸다.
  •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 소란에 주방에서 걸어 나온 정우는 강소리를 발견하자마자,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 "강소리. 말조심해."
  • 그의 말투에는 꾸짖음이 섞여 있었지만, 그리 엄하진 않았다.
  • 강소리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보란 듯이 정우 곁으로 다가가 그의 팔짱을 찰싹 껴안았다.
  • "내가 틀린 말 했어? 이미 바닥에 소문 쫙 깔렸잖아. 네가 그 정신 나간 여자 하나 때문에, 우리 집안이랑 맺은 혼약까지 깨버렸다고."
  • 혼약?
  •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정우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 "강소리, 그만해라."
  • 그는 억센 여자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내고는,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등 뒤로 감쌌다.
  • "여긴 내 집이야. 다음부턴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지 마. 당장 나가."
  • 강소리의 오만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우를 쏘아보았고, 커다란 눈망울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 "김정우, 너 지금 저 여자 때문에 날 쫓아내는 거야? 우리 아빠가 널 어떻게 키워줬는지 벌써 잊었어? 네가 제일 밑바닥이었을 때 누가 네 옆에…"
  • "그 입 다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