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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한서연 시점】
  • 나는 휠체어를 밀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기를 찢듯 울렸다.
  • “야, 너… 여기서 뭐 해?”
  • 고개를 드니,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한 여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 윤세린이었다.
  • 그녀는 강준호의 보호 아래, 지나치게 온실 속처럼 자란 사람이었다.
  • 윤세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훑어봤다. “그렇게 큰 교통사고 나고도, 아직도 안 죽었어?”
  •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 “어? 내가 교통사고 난 거, 넌 어떻게 알았지?”
  • 윤세린은 와인잔을 천천히 굴리듯 만지작거리며, 나를 향해 비웃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 “운 좋네, 아주. 근데… 안 죽었어도 얼굴은 끝났지? 이렇게 보기 흉한데, 굳이 가릴 필요 있어?”
  • 다음 순간—
  • 와인이 그대로 쏟아졌다. 차가운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 뒤에 서 있던 수행원들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 입으로는 예의 있게 했지만, “닦아줄게.”라고 하면서
  • 손은 수건으로 내 얼굴을 거칠게 훑고 지나갔다.
  • 화장이 벗겨지고,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드러났다.
  • 알코올이 스며들며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번졌다. 숨이 가빠졌다.
  • 몸을 피할 힘도 없었다. 그때 윤세린이 손짓 한 번 하자, 그제야 그들이 물러났다.
  • 윤세린이 웃었다. “오늘 강준호가 왜 널 불렀는지 알아? 우리 결혼 발표하려고. 쉽게 말해 오늘이 너희 둘 마지막 만남이야. 그 얼굴로 뭘 남길 수 있을 것 같아? 결국 기억되는 건 하나겠지. 흉한 모습. 앞으로 그 사람 머릿속엔 그것만 남을 거야. 하하하하!”
  • 나는 휠체어 옆 주머니에서 소독 티슈를 꺼내, 상처를 천천히 닦았다. 그녀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 강준호. 그가 누구와 결혼하든 이제 상관없다.
  • 그가 나를 어떻게 기억하든 더더욱.
  • 어차피, 다시는 만날 일 없을 사람이니까.
  • 문제는 윤세린이었다. 늘 더러운 방법을 택하고 겉과 달리 속은 훨씬 더 음험했다.
  • 그녀의 말투만으로도, 이번 사고가 그녀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보긴 어려웠다.
  • 남자를 두고 벌이는 싸움이라면, 나는 이미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녀가 준 고통은, 나는 절대, 그대로 넘기지 않는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
  • 갑자기 윤세린이 와인잔을 내던졌다. 유리가 산산이 깨지며, 조각 하나가 그녀 발을 스쳤다.
  •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 “서연아, 미안해.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화 풀어. 내가 지금 당장 닦아줄게.”
  • 말을 하며, 유리 조각 위로 발을 내디디려 했다. 그때 뒤에서 손이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 너무나도…뻔했다. 나는 말없이 시선을 떨궜다.
  • 그런데 그 남자는 그녀보다 더 어리석었다.
  • 강준호가 나를 향해 쏘아붙였다.
  • “내가 잠깐 비운 사이에, 네가 여기서 세린을 괴롭혀? 아직도 네가 내 아내인 줄 알아? 가만 안 둔다!”
  •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윤세린을 안아 든 채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 몇 계단만 오르면 바로 연단이었다. 그는 그녀를 내려놓고 마이크를 들었다.
  • “여러분, 오늘 중요한 발표가 있습니다.”
  • 무대 위에서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내려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안에는 오직 혐오뿐이었다.
  • “저는 한서연과 이혼하고, 윤세린과 결혼할 겁니다.”
  • “그때 한서연과의 결혼은 사업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습니다. 이제 협력은 끝났습니다. 따라서, 관계도 정리합니다.”
  •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윤세린 단 한 사람입니다.”
  • 순간, 연회장이 술렁였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 그저 고개를 숙여, 윤세린에게 입을 맞췄다.
  • 그 장면은 무대 위 조명보다 더 눈부셨다. 그런데도, 내 안에는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 그 남자는 이미 죽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은, 그날 수술대 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나는 반지를 들고 연단으로 향하던 수행원을 붙잡고, 이혼 서류를 건넸다.
  • “가서 한마디만 전해주세요. 행복하라고.”
  • 수행원은 나를 동정 섞인 눈으로 한번 보더니, 서류를 받아 들고 급히 무대로 올라갔다.
  • 나는 멀리 번지는 불빛을 바라봤다. 강준호의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 그는 몹시 들떠 있었다. 조금은 긴장한 듯했다.
  • 그는, 오랫동안 바라던 사람을 향해 평생을 약속했다.
  • 환호성이 터지는 가운데, 나는 완전히 분리된 존재처럼 서 있었다.
  • 둘이 행복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걸 보다가,
  • 나는 조용히 시선을 거뒀다. 여윈 어깨로 휠체어를 밀며,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