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한서연 시점】
- 나는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 진실을 외치고 싶었다. 강준호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야— 그 사람은 내가 맞다고!
- 하지만 결국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입은 건 아직도 엄마가 기워 준 낡은 스웨터였으니까.
- 속이 뒤틀렸다. 억울했고, 분했고,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 그런데 눈앞의 둘은 한눈에 봐도 다른 세계 사람이었고, 서로 너무 잘 어울렸다.
- 결국 그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 말해도 강준호는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나는, 감히 재벌가 후계자와 같은 자리에 서서 행복을 바랄 자신이 없었다.
- 그래도 강준호에게 다가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조용히 그의 곁에 남았다,
- 그 대가로 아이들에게서 ‘충견’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 나는, 그를 따라다녔고 지켰고 도왔다. 십 대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 그러다 5년 전, 부모님의 회사가 시장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 그리고 나는 뜻밖에도, 부유한 집안의 딸이 되었다.
- 우리 집 회사가 이제 강씨 가문과 같은 대기업과도 협력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 드디어 숨이 트였다. 자신감도 생겼다. 이제야 강준호 옆에 당당히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러다 윤세린이 유학을 떠나면서, 둘은 좋지 않게 갈라섰다.
- 나는 용기 내서 그에게 고백했다.
- 그는 날 거절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 못 했다.
- 나는 그를 사랑했다.
-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깊이 빠져 있었다.
- 그를 갖고 싶었다!
- 그래서 수없이 다가갔고, 어떻게든 마주칠 이유를 만들고,
- 끊임없이 마음을 전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백했다.
- 하지만 그는 끝까지, 나를 밀어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 그러다 3년 전, 강씨 가문이 거대한 위기를 맞았다.
- 나는 우리 집 자금과 핵심 사업 정보로 내걸고 협상에 나섰다. 조건은 정략결혼.
- 결국 우린 결혼했다.
- 그때의 나는 행복에 취해 있었다. 강준호가 언젠가는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그렇게 믿었다.
- 하지만, 결혼한 지 두 달째 되던 날.
- 윤세린이 돌아왔다. 다시—강준호 앞에.
- ……
- 지금, 차가운 병상에 누워서야 깨달았다.
- 내가 그때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틀렸는지.
- 십 년을 곁에 있었지만, 남은 건 상처뿐이었다.
- 이제야 알겠다. 아무리 애써도, 나는 끝내 그의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 그 만남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일이었다.
- 우리 사이의 감정은, 내가 어린 시절 그의 병실을 떠난 그 순간에 끝났어야 했다.
- 이제 와서 과거를 따질 생각도 없고, 그와의 미래도 더는 원하지 않는다.
- 의료 기계에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도, 나는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 이제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오직 나를 위해 살고 싶다.
- “강준호에 대한 사랑을 잊을게. 그 대신, 난 살아남겠다.”
- 의사와 간호사들이 뛰어 들어왔고, 내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 사람들의 그림자와 수술등 불빛이 뒤엉켰다가 흩어지고, 끝내 내 거칠고 가쁜 숨소리만이 귓가에 남았다.
- 길고도 끔찍한 꿈에서 깨어난 듯, 한 통의 전화에 눈이 떠졌다.
- 화면에 뜬 이름은—강준호였다.
- 수술이 잘 됐는지 관심도 없었다. 첫마디부터 명령이었다.
- “한서연, 내일 연회에 와. 발표할 게 있어.”
- 그건 지난달에 확정된 강씨 가문의 업계 연회였다. 사업 관계자들이 대부분이 온다. 현 강씨 가문의 안주인인 나는 당연히 참석해야 한다.
- “좋아. 마침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거.”
- 전화를 끊고 숨을 고르며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굳은 눈으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준호와의 이혼 서류 준비해줘. 모레 출국 수속도.”
- 간호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서연 씨, 지금은 퇴원하시면 안 돼요.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타박상과 골절이 많아서 좀 더 지켜봐야 해요.”
-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 그날 밤, 나는 결국 퇴원했다.
- 휠체어에 앉은 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몇 번이나 덧발라서야 겨우 얼굴의 상처가 가려졌다.
- 화장품은 겉자국만 가릴 뿐, 무너진 마음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 나는 이혼 서류를 들고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강준호를 찾아갔다.
- 확신했다.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용기 내는 순간이라고.
- 이 10년의 모든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소녀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랑해온 그 남자를 놓아주려 한다.
- 그리고 내 손으로 이 관계를 끝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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