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허리가 파도처럼 더 아프게 욱신거렸다.
- 나는 조리대에 손을 짚고 겨우 일어섰다.
- 김재훈이 박한나를 껴안은 채 미간을 바짝 찌푸렸다.
- 눈빛에 불이 붙은 듯, 나를 활활 태워버릴 기세였다.
- “사과해.”
- 낮게 깔린 목소리, 토 달 수 없는 명령이었다.
-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웃자마자 허리 상처가 더 욱신했다.
- “나 걔한테 손도 안 댔어, 그런데 내가 왜 사과해?”
- 박한나는 더 서럽게 울더니 김재훈 품으로 쏙 파고들었다.
- “재훈 오빠, 언니한테 억지로 시키지 마. 내 잘못이야, 내가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 그 말에 김재훈 얼굴이 더 굳었다.
- 그가 성큼 다가와 내 팔을 낚아채려 했다.
-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는 거야. 사과해.”
- 나는 그의 손을 피하고, 옆 현관 테이블에 이혼 합의서를 탁 내리쳤다.
- “김재훈, 우리 아직 이혼도 안 했어, 그런데 여길 데려와서 설치게 해?”
- “사과는 쟤가 해야지. 그리고 내 집에서 꺼져.”
- 박한나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한 채 김재훈을 올려다본다.
- “오빠, 나 그냥 갈게. 부부 사이 내가 더 꼬이게 만들면 안 되지……”
- 그녀가 나가려 하자 김재훈이 확 끌어당겼다.
- “갈 필요 없어.”
- 그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한 글자씩 눌러 뱉었다.
- “나가야 할 사람은 저쪽이야.”
- 나는 잠깐 멍했지만, 곧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 “이 집, 내 혼전 재산이거든. 네가 뭔데 나보고 나가래?”
- “김재훈, 여자한테 홀려서 정신 나간 거 아냐?”
- 급소를 찌른 듯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 “너네 집 돈 좀 있다고 내 앞에서 잘난 척하는 줄 아나 본데!”
- “나 없었으면 너희 블랙스톤 그룹이 서울에서 이렇게 클 수 있었겠어?”
- 나는 폰을 꺼내 모바일뱅킹을 켰다.
- 3년 전에 딜런 그룹에 투자금 넣었던 이체 내역을 띄워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 “1억 7천만. 원금이랑 이자까지 지금 갚아. 그럼 당장 나갈게.”
- 김재훈의 낯빛이 붉었다가 하얘졌다가, 한동안 말이 막혔다.
- 박한나는 눈치 보며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 “재훈 오빠, 그럼… 나 먼저 갈까……”
- “가지 마.”
- 김재훈이 이를 악물고 박한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 “오늘 이 여자가 너한테 뭘 할 수 있나 보자.”
- 더 이상 말 섞기 싫었다. 나는 폰으로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경호팀이죠? 저 이다율 애스터예요. 지금 관계없는 두 명이 침입했거든요. 2층으로 올라와서 모셔내요.”
- 전화를 끊고 벽에 기대 차갑게 그들을 노려봤다.
- 김재훈은 분에 겨워 온몸을 떨었다. 나를 손가락질하며 한참 만에 한마디 내뱉었다.
- “좋아. 아주 좋아, 이다율. 두고 봐, 후회하지 마!”
- 그가 박한나를 끌고 문으로 향했다. 문을 확 열자마자 올라오던 경호원들과 딱 마주쳤다.
- 경호원 두 명이 문간에 서서 상황을 보고 난감해했다.
- “김재훈 씨, 이게……”
- “가자.”
- 김재훈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는 박한나를 끌고 경호원을 밀치며 나갔다.
- 계단 끝에서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고, 저택에 드디어 고요가 내려앉았다.
- 나는 허리를 부여잡고 겨우겨우 소파로 옮겨 앉았다.
- 허리가 너무 아파 옷자락을 들어 올려 보니, 커다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 주치의에게 전화하려고 폰을 들었는데, 화면이 먼저 켜졌다.
- 최하민의 전화였다.
- 나는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최대한 평소처럼 차분하게.
- “여보세요?”
- “누나, 왜 아직도 안 와? 나 카페에서 30분째 기다리는 중이야.”
- 또렷한 소년 톤의 목소리, 살짝 서운함이 묻어났다.
- 가슴속에서 끓던 화가 절반은 꺼졌다.
- “미안. 집에 좀 일이 있었어. 지금 갈게.”
- “괜찮아, 난 얼마나 기다리든 상관없어.”
- 그는 금세 밝아졌다.
-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치즈케이크 먼저 주문해 둘게.”
- 전화를 끊고 허리 멍을 가릴 수 있는 긴팔 후드티로 갈아입었다. 차 키를 챙겨 나왔다.
- 카페는 오래된 동네 골목에 있었고, 조명은 누렇게 어둑했다.
- 최하민은 맨 안쪽에 앉아 있었다. 검은 후드티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각진 얼굴의 반쪽만 드러나 있었다.
- 내가 다가가자 그는 벌떡 일어나 의자를 빼 줬다.
- “다율 누나, 왜 이제 와. 커피 식겠다.”
- 그가 치즈케이크를 내 앞으로 밀어 놓고, 커피도 내가 집기 편한 쪽으로 옮겼다.
- 내가 손을 뻗으려는데, 그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내 팔을 받쳐 줬다.
- “허리는 왜 그래? 자세가 이상한데.”
- 순간 멍해졌다. 이렇게까지 잘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 “아니야, 아까 살짝 부딪혔어.”
- 그는 말없이 내 후드티 밑단을 살짝 들어 올렸다.
- 멍든 자리를 보자마자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 “누가 그랬어?”
- 평소의 장난기라고는 1도 없었다. 목소리가 낮게 깔리고, 살벌했다.
- 나는 옷자락을 내려 덮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 “그만해. 그냥 부딪힌 거야.”
- 그는 한참 동안 나를 뚫어지게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콜라 캔을 쥔 손가락 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 그날 밤 우리는 오래 앉아 먹었다. 그는 학교 얘기를 잔뜩 쏟아냈다.
- 룸메들이 맨날 게임하고 파티만 다닌다나 뭐라나.
- 나는 가끔 한두 마디씩 맞장구쳤고, 가슴에 걸려 있던 답답함이 서서히 풀렸다.
- 다 먹고 그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 차가 저택 앞에 멈추자, 그가 불쑥 돌아서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 “누나 주려고.”
- 열어 보니 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조그만 축구공 모양.
- “돈 모아서 산 거라 비싼 건 아니야.”
-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귓불이 살짝 빨개졌다.
- “그냥 하고 다녀.”
- 나는 그 펜던트를 보다가 문득 마음이 철렁했다.
- “너 축구 좋아해?”
- “응, 시간 나면 그냥 차고 놀지.”
- 환하게 웃자 하얀 이가 드러났다.
- “나중에 기회 되면 초대할게. 직접 와서 봐.”
- 목걸이를 걸자 펜던트가 가슴팍에 똑 떨어졌다. 차갑게 스쳤다.
-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위험할 만큼 반짝였다.
- “다율 누나, 그 사람이랑 언제 이혼해?”
- 나는 멈칫하며 말이 막혔다.
- 그가 성큼 다가왔다. 그의 숨이 얼굴에 스쳤다. 고기 굽고 온 쯔란 냄새가 은근히 났다.
- “난 기다릴게. 얼마나 걸리든.”
- “누나가 이혼하면, 그땐 내가 당당하게 누나한테 대시할 거야.”
- 그의 눈이 너무 맑고 밝았다. 마치 온 하늘의 별을 담아놓은 듯.
- 내가 막 말을 꺼내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김재훈에게서 온 문자였다.
- 문장은 딱 한 줄.
- “이혼하고 싶어? 꿈 깨.”
- 나는 화면을 꺼 버리고 최하민을 올려다봤다.
-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눈빛이 뜨거워서 내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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