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4화 내 적의 적은 나의 동지

  • “지난 번처럼 세로토닌제 같은 약으로 처방해드릴게요.”
  • 내 진료실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늑한 공간이다. 내 앞에서 대략 20분 가량 눈물을 흘리던 50대의 덩치가 큰 여자분은 그제서야 눈물을 닦았다.
  • “우울증 약은 꾸준히 드셔야 차도가 있어요. 약 드셔보시다가 다음 주에 또 뵐게요.”
  • 덩치가 큰 이 여성 환자는 벌써 병원에 방문한 지도 두 달이 넘었다. 매번 진료에 올 때마다 눈물을 쏟아내 내 블랙리스트 환자다.
  • 게다가 어제 마신 술이 속에서 요동을 치는 바람에 오늘은 유독 더 괴롭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의사선생님.”
  • “네에. 조심히 들어가세요.”
  • 여자가 진료실 문을 나가고 나서 다시 다음 환자를 알리는 문구가 모니터 화면에 나타났다.
  • [다음환자분 바로 들여보낼까요. 김시영 선생님?]
  • 하아. 벌써 오후 다섯 시다.
  • 환자들을 이렇게 하루종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진이 다 빠진다. 그래도 퇴근까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 오늘 지각했으니 잠시도 쉴틈 없이 일해야 원장님께 사랑받는 예쁜 봉직의가 될 것이다.
  • [응 들여보내요.]
  • 다음 환자는 ‘이지훈‘이란 환자.
  • ‘이지훈. 처음 보는 환자인데. 신규 환자인가.’
  • 신규환자일수록 진료시간은 더 길어지는 법이다. 후아. 좀만 더 버티자. 김시영. 어제 마신 술에 속이 영 좋질 않았다. 어제 그 디올 정장 말대로 오바이트를 많이 한 것 같다.
  • 문이 열리고 환자의 굵직한 구두굽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이 환자는 어떤 고민을 털어놓아서 내 진을 다 빼놓으려나. 내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안녕하세요. 이지훈 님. 어떤 일로 오셨을까…… 헉. 그쪽은 아침에 호텔에서 본??!!!”
  • 문을 열고 들어온 환자는 다름아닌 아침에 본 그 디올 정장이었다.
  • 그는 언제 옷을 갈아입은 건지 남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여전히 잘생겼다.
  • “생각해봤어요?”
  • 그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말했다.
  • “아니 그쪽이 왜 여길. 혹시 어디 아파요?”
  • 우울증인가. 혹시 남몰래 앓고 있는 공황장애? 영문을 모르는 내게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진료실 책상에 팔을 짚고 내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흠칫 놀란 내가 뒤로 의자를 살짝 밀었다.
  • “딱 7시간 준다고 했을텐데요. 내가 굉장히 바쁜 사람이라고 말 안했나?.”
  • 그의 말을 듣고 탁상시계를 봤다. 아까 열시로부터 정확히 7시간이 지나 있었다.
  • 설마 아까 그거 진심이었나. 자기 아내가 되어 달라고. 그럼 나야 땡큐지만. 사기꾼이 아니고서야 왜 나한테 그런 말도 안되는 청혼을.
  •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왜 나한테 청혼을 해요 그쪽이. 호텔 대표라면서.”
  • 후우...
  • 그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냐는 듯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 “그쪽 전남편 김민준.”
  • 뭐? 내 전남편이 왜 나와 갑자기?
  • “그쪽 전남편 김민준이 내 이복 여동생 남편될 사람이에요. 이연희라고 알죠?”
  • 그가 내게 턱짓을 하며 물었다.
  • “당신이 오징어 다리처럼 찢어서 자근자근 씹어먹고 싶다던 그 이연희가 바로 내 이복 여동생.”
  • 내가 언제 오징어 다리 얘기를 했던가….. 술김에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 “뭐. 간단히 말하면 그쪽에서 우리 기업 회장자리를 욕심내고 있거든요. 그래서 나는 그.쪽.이 필요해요.”
  • “뭐라구요?”
  • “그쪽이랑 나. 같은 편인 것같은데?”
  • 내 적의 적은 나의 동지라고 했다. 내 적인 김민준과 이연희. 그 둘과 사이가 좋을 리 없는 이복 오빠 이지훈 대표. 그럼 내 앞의 이 남자는 확실한 내 편이다.
  •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는 이혼녀인데.”
  • “나도 몇년 전에 이혼했어요.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회장님이 내가 빨리 재혼하길 바라시거든요. 회사를 물려받으려면 회장님 눈 밖에 나면 안돼서.”
  • 말을 마친 그가 매력적인 눈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 “세상에..”
  •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이 적임자인데.”
  • 뭐. 이런 경우가 다있어. 무슨 결혼하자는 말을 부하직원한테 일맡기듯이 해.
  •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 “결.. 결혼식은 언젠데요.”
  • “11월 27일. 김민준과 이연희의 결혼식인 12월 27일의 정확히 한 달 전.”
  • 지금은 녹음이 우거지는 8월 중순이다.
  • “그럼 세 달 뒤?? 뭐가 그렇게 빨라요!”
  • “그래서 할 거예요, 안할 거예요.”
  • “내가 안…안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 그가 몸을 일으켰다. 바로 발 빼겠다는 의미같았다.
  • “바로 다른 적임자를 찾아야죠. 세 달 안에. 내가 시간이 없어서 말이죠.”
  • “세상에…”
  • “그래서. 할 건가요. 말 건가요.”
  • 어떻게 해야 하지. 이 남자의 말이 맞다면 전남편과 그 불륜녀 이연희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복수를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재혼한다는 건 여자에게는 굉장히 큰 일이다. 물론 잘난 남자랑 재혼해서 김민준 그자식이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 “안할 건가요?”
  • 그의 예민한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치 고민하고 있는 나를 꿰뚫어보는 것만 같았다.
  • “그게..”
  • “망설이는 걸 보니.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가 보네요. 근무 잘해요. 그럼 난 급한 일이 있어서.이만.”
  • 그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하고 내게서 몸을 돌렸다. 그가 몸을 돌리자 차디찬 에어컨바람같은 그의 향수향이 내 시린 몸을 움찔하게 했다.
  • 행동 하나하나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깔끔한 남자였다. 아니. 그렇게 빨리 물어보고 빨리 나가 버리면, 내가 당황스럽잖아.
  • ‘살면서 사람에게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는데, 이거 기횐가?’
  • 이지훈 대표가 진료실 문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당겼다.
  • 열린 문틈으로 밖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수십 명의 환자들이 내 눈에 보였다.
  • 지금 이 남자가 나가고 나면 저 환자들이 내게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겠지.
  • 평생 나는 환자들의 아픈 이야기만 이 작은 단칸방 안에서 들으며 살아야 할 게 분명하다.
  • 재혼을 못할 수도 있다.
  • 대한민국에서 이혼녀 타이틀은 여자에게 치명적이니까.
  • 이지훈 대표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저 사람은 이대로 가면 다시는 못볼 사람이다.
  • 저 남자에게 결혼하자고 지금 매달려 있을 여자들이 수백 트럭일텐데..
  • 그가 문을 당기고 거의 문 밖으로 나서려고 하고 있었다.
  • 이대로 가면 안돼. 생각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 “스…”
  • 나도 모르게 몸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 이번에는 내 입에서 그를 붙잡으려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가 나왔다.
  • “스토오오오오오옵!!!!!!!!!”
  • 그가 발걸음을 멈춰섰다.
  • 내 엉덩이가 뒤로 밀려가면서 무릎이 책상 서랍장에 세게 부딪혔다.
  • “아야아… 아 내 무릎…”
  • 나를 돌아보는 그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가며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이지훈 대표가 문을 쾅 닫았다.
  • 얼얼한 무릎을 문지르며 내가 빠르게 말했다.
  • “그쪽이랑 재혼. 할게요! 하. 하면 되잖아요.”
  • 그의 붉은 입술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설마 일부러 저런 건가. 뭔가 낚인 것같은 이 기분은 뭐지.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협상의 대가였다.
  • “그래요. 그럼. 먼저 결혼반지부터 사러 가죠. 이따 6시 퇴근인가. 아래 차를 대기시켜 둘테니까 퇴근하고 보자구요.”
  •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가 문을 열고 진료실 밖으로 사라졌다.
  • 다음 환자를 알리는 간호사의 메시지가 화면 안에서 깜빡깜빡했다.
  • “세달 뒤에 결혼식이라고. 세상에나.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 ***
  • 이지훈 대표가 말한 대로 병원에서 퇴근하는 내 앞에 커다란 마이바흐 한 대가 섰다.
  • 불륜녀 이연희의 집안이 재벌가라고 듣긴 했지만, 국내 최고 호텔을 계열사로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자인 줄은 알지 못했다. 뭐.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내 기억에서 그 여자만 지우개로 싹 지워버리고 싶었을 뿐.
  • 기사가 운전하는 마이바흐 뒷자석에 탄 나는 이윽고 백화점에 도착했다.
  •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 부모님은 좋아하실 거다. 과년한 딸 이혼 후 연애 안하냐고 하루가 멀다하고 물어보셨으니까.
  • “대표님께서는 바쁜 일이 있으셔서 조금 이따가 오신다고 하십니다. 먼저 들어가서 구경하시죠.”
  • 아. 네에. 근데 그러기엔 내 옷차림이 조금 불량한데.
  • 내 옷차림은 남자용 큰 화이트 티셔츠에 남자 반바지 차림이었다.
  • 아무래도 대표가 어젯밤 토사물이 묻은 내 옷 대신 자기 옷을 입힌 모양이었다. 병원 안에서야 하얀 가운을 입으니까 옷이 안 보여서 괜찮았는데, 이 옷차림으로 백화점에 들어가기는 영 부끄러웠다.
  • 백화점에 다들 예쁘게 하고 화장까지 완벽하게 하고 왔을텐데.
  • 백화점 유리창에 나를 비춰보았다. 화장기 없는 내 얼굴. 영 볼품없어보였다. 그래도 화장하고 예쁘게 옷입으면 봐줄만 한데.
  • “불가리 매장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대표님 성함 말씀하시면 바로 안내해주실 겁니다. 그럼.”
  • 기사가 인사를 하고 차를 몰고 갔다.
  • 하아. 이 상태로 명품 매장을 들어가면 쫒겨날 것같은데.
  • 그래도 방송에 몇번 출연했으니까 내 얼굴을 알아봐주려나.
  • 휴우. 일단 들어가야지. 별수 없다.
  • 청담동의 백화점은 평일 저녁 6시 반에도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다들 저마다 명품 가방에 명품 옷들을 휘감고 다녔다. 나도 모르게 기가 팍 죽어 버렸다.
  • 무튼 어서 불가리 매장을 찾아야 한다.
  • “아. 저기있다.”
  •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불가리 매장은 주변 매장들과 달리 위용이 있었다.
  • 쭈뼛쭈뼛 내가 매장으로 다가가자 매장 직원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저.. 저기.”
  • “네. 무슨 제품 찾으시나요?”
  • 내 행색이 영 물건을 살 것같진 않아 보였나 보다. 비쩍 마른 여직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나를 무시하며 말했다.
  • “예약했는데.”
  • “아아. 손님. 예약서비스는 vvvip 고객님들 대상으로만 제공하는 서비스입니다. 매장에 들어오고 싶으시면 저기 줄을 서주시기 바랍니다.”
  • 뭐 vvvip? v가 대체 몇 개야. 여직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서너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 “저기. 예약했어요 나.”
  • “아이 참. 손님. 매장 들어오고 싶으시면 저쪽 맨 뒤에 줄 서주시라니까요.”
  • 여직원이 내 등을 억지로 밀며 말했다. 은근히 무시당하는 것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비쩍 마른 여직원의 등쌀에 서너 명 줄을 선 맨 뒤에 줄을 섰다.
  •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 ‘이게 뭐람. 옷이나 좀 집에서 바꿔 입고 나올걸.’
  • 속상했다. 이런 걸 바라고 이지훈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나름 신데렐라같은 멋진 상황을 꿈꿨었다.
  • 내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 내 옷차림은 유독 여기서 튀긴 했다.
  • 엉덩이를 한참 덮는 박시한 흰티에 추리닝 반바지라니.
  • 거기에 신발도 다 떨어진 병원 쓰레빠다.
  • 게다가 아침에 호텔에서 머리도 못감고 나왔으니
  • 다들 나를 나이든 백수 나부랭이로 보고 있을 것이다.
  • 역시 명품매장은 잘꾸미고 와야 한다.
  • ‘그냥 집에 갈까. 이대로 안에 들어가면 명품매장 직원들한테 무시당할 게 뻔한데’
  • 내가 망설이고 있던 그 때,
  • 이제 막 들어온 듯한 구찌가방을 맨 아줌나가 나를 밀치고는 새치기를 했다.
  • 내가 버젓이 줄을 서 있는데, 그녀는 나를 옆으로 휙 밀치고는 내 앞에 줄을 섰다.
  • 뭐지.
  • 미세하게 내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 그리고 그 아줌마는 휙 고개를 돌리더니 내 옷차림을 아예 노골적으로 대놓고 쳐다보았다. 아줌마는 대놓고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유독 기분 나쁜 눈초리였다.
  • 김민준과 이연희의 바람을 겪은 이후, 내겐 큰 교훈이 생겼다.
  • [불쾌한 일을 당하면, 꼭 바로 그 자리에서 앙갚음을 해주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복수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 내가 김민준의 외도를 경험했을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게 저런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위로도 아니고, 관심도 아닌 시선들. 나를 보며 자기 자신의 상황은 더 낫다 안도하는 저런 눈빛들.
  • 아주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도 나를 계속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마치 옷을 허름하게 입은 나는 명품 매장에 들어올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 기분 나빴다.
  • “거기 구찌가방 매신 아주머니?”
  • 아주머니가 자길 부른 거냐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 “나?”
  • “네. 아주머니.”
  • 그녀가 당황한 사이 내가 바지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마침 이지훈 대표에게 주려고 주머니에 넣어둔 명함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명함을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 [정신건강의학과 김시영 전문의]가 또렷하게 적힌 하얀 명함이 아주머니 손에 닿았다.
  • “여기. 혹시 치료 받고 싶으시면 제 병원으로 오셔서 저 찾아오세요.”
  • 명함을 받아든 아주머니가 당황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당황한 듯 내 명함 앞뒤를 보더니 주변을 의식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 “정..신 건강…의학과…? 나 어디 아픈 데 없는…데?”
  • 팔짱을 끼고 나는 키가 작은 아줌마를 한참 내려다 보며 나직이 말했다.
  • “아주머니. 병이 있어 보여서요.”
  • “무 무슨 소리예욧!”
  • 그녀가 당황해 흘끗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조용한 명품 매장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우리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 구찌 명품백에 페라가모 귀걸이, 그리고 명품처럼 보이지만 가짜인 게 분명한 저 조잡한 샤넬 티셔츠. 아주머니는 주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사람인 듯했다.
  • 팔짱을 낀 채로 일부러 내가 주변에 들릴 만한 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