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의 백화점은 평일 저녁 6시 반에도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다들 저마다 명품 가방에 명품 옷들을 휘감고 다녔다. 나도 모르게 기가 팍 죽어 버렸다.
무튼 어서 불가리 매장을 찾아야 한다.
“아. 저기있다.”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불가리 매장은 주변 매장들과 달리 위용이 있었다.
쭈뼛쭈뼛 내가 매장으로 다가가자 매장 직원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저기.”
“네. 무슨 제품 찾으시나요?”
내 행색이 영 물건을 살 것같진 않아 보였나 보다. 비쩍 마른 여직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나를 무시하며 말했다.
“예약했는데.”
“아아. 손님. 예약서비스는 vvvip 고객님들 대상으로만 제공하는 서비스입니다. 매장에 들어오고 싶으시면 저기 줄을 서주시기 바랍니다.”
뭐 vvvip? v가 대체 몇 개야. 여직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서너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저기. 예약했어요 나.”
“아이 참. 손님. 매장 들어오고 싶으시면 저쪽 맨 뒤에 줄 서주시라니까요.”
여직원이 내 등을 억지로 밀며 말했다. 은근히 무시당하는 것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비쩍 마른 여직원의 등쌀에 서너 명 줄을 선 맨 뒤에 줄을 섰다.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이게 뭐람. 옷이나 좀 집에서 바꿔 입고 나올걸.’
속상했다. 이런 걸 바라고 이지훈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나름 신데렐라같은 멋진 상황을 꿈꿨었다.
내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내 옷차림은 유독 여기서 튀긴 했다.
엉덩이를 한참 덮는 박시한 흰티에 추리닝 반바지라니.
거기에 신발도 다 떨어진 병원 쓰레빠다.
게다가 아침에 호텔에서 머리도 못감고 나왔으니
다들 나를 나이든 백수 나부랭이로 보고 있을 것이다.
역시 명품매장은 잘꾸미고 와야 한다.
‘그냥 집에 갈까. 이대로 안에 들어가면 명품매장 직원들한테 무시당할 게 뻔한데’
내가 망설이고 있던 그 때,
이제 막 들어온 듯한 구찌가방을 맨 아줌나가 나를 밀치고는 새치기를 했다.
내가 버젓이 줄을 서 있는데, 그녀는 나를 옆으로 휙 밀치고는 내 앞에 줄을 섰다.
뭐지.
미세하게 내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그리고 그 아줌마는 휙 고개를 돌리더니 내 옷차림을 아예 노골적으로 대놓고 쳐다보았다. 아줌마는 대놓고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유독 기분 나쁜 눈초리였다.
김민준과 이연희의 바람을 겪은 이후, 내겐 큰 교훈이 생겼다.
[불쾌한 일을 당하면, 꼭 바로 그 자리에서 앙갚음을 해주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복수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내가 김민준의 외도를 경험했을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게 저런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위로도 아니고, 관심도 아닌 시선들. 나를 보며 자기 자신의 상황은 더 낫다 안도하는 저런 눈빛들.
아주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도 나를 계속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옷을 허름하게 입은 나는 명품 매장에 들어올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기분 나빴다.
“거기 구찌가방 매신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자길 부른 거냐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
“네. 아주머니.”
그녀가 당황한 사이 내가 바지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마침 이지훈 대표에게 주려고 주머니에 넣어둔 명함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명함을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정신건강의학과 김시영 전문의]가 또렷하게 적힌 하얀 명함이 아주머니 손에 닿았다.
“여기. 혹시 치료 받고 싶으시면 제 병원으로 오셔서 저 찾아오세요.”
명함을 받아든 아주머니가 당황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당황한 듯 내 명함 앞뒤를 보더니 주변을 의식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정..신 건강…의학과…? 나 어디 아픈 데 없는…데?”
팔짱을 끼고 나는 키가 작은 아줌마를 한참 내려다 보며 나직이 말했다.
“아주머니. 병이 있어 보여서요.”
“무 무슨 소리예욧!”
그녀가 당황해 흘끗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조용한 명품 매장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우리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 구찌 명품백에 페라가모 귀걸이, 그리고 명품처럼 보이지만 가짜인 게 분명한 저 조잡한 샤넬 티셔츠. 아주머니는 주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사람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