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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호텔에서의 첫만남 그리고

  • 이지훈 대표를 처음 만난 장소는 고급스러운 호텔 바였다.
  • 그날은 전남편 김민준이 불륜녀 이연희와 약혼한 날이었다.
  • 나를 배신한 그 두 사람의 행복한 시작을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견디기 어려웠다. 발렌타인 32년산을 연거푸 비우고 허한 내 몸을 술로 채워넣었다.
  • “나쁜놈. 감히 날 배신하고 불륜을 해? 지가 그렇게 잘났어? 하. 나도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야아. 과고 조기졸업하고, 의대도 조기졸업했어 내가 말야 내가 이런 사람이야.”
  • 나는 술이 약하다. 술만 마시면 솔직히 나는 할말 못할말 못가리는 ‘꼰대‘가 된다.
  • “내가 너보다 훠얼씬 잘난 놈 만나서 꼭 재혼한다 내가. 세상에 잘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봐봐라. 현빈. 박서준. 정해인. 공유. 유아인. 송승헌. 송중기. 조인성. 정우성. 남주혁.”
  •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남자연예인들을 큰 목소리로 나열했다.
  • “또 누가 있더라. 잘생긴 애들 진짜 많았는데.”
  • 드라마에 많았는데, 멋지고 잘생긴 애들. 걔가 누구더라.
  • “그 또 뭐야. 송중기. 정해인!”
  • “송중기. 정해인은 아까 했는데?”
  • 어라. 어디선가 남자의 감미로운 첼로 음같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주지훈! 박서준!”
  • “박서준도 아까 했잖아요?”
  •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왠 젊은 남자가 내 눈앞에 서있었다. 그의 오른손엔 핏빛보다 붉은 와인이 가득한 잔이 들려 있었다.
  • 그가 입은 옷은 몸에 적당히 근육이 붙어있고 모델같아야 잘 어울린다는 디올 정장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있었고, 손목엔 불가리 시계가 깔끔하게 올려져 있었다.
  • ‘고급스럽다.‘
  • 처음 그를 보고 머릿속을 스쳐가는 단어였다. 그는 고급스럽고 반듯한 외모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가움이 묻어나왔다.
  • “되게 잘생겼네.”
  • 내 말을 듣고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이 살짝 감겼다. 눈이 감기는 그 모양새가 예뻐서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김민준도 되게 잘생겼는데. 근데 솔직히 니가 더 낫다. 인정.”
  • “김민준? 그게 누구죠?”
  • 남자의 예민해보이는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남자는 존댓말을 사용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졌다.
  • “내 전남편. 정신과 의사 김민준. 바람나서 나 버리고 상간녀 이연희랑 재혼하는 김민준요.”
  • 정신이 나간 마냥 실실거리며 말하는 나를 남자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나는 자꾸만 눈이 감겼다. 멋진 남자를 봐서 넋이 나가서인지 자꾸 눈을 감고 싶어졌다.
  • 귀공자같은 그가 자신의 갈색 머리칼을 넘기며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이마로 흘러내려오는 그의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내 마음을 간질였다.
  • “설마. 압구정에서 병원 운영했다던 그 김민준?”
  • “어? 김민준을 어떻게 알지. 혹시 그쪽 거기 환자예요?”
  •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이상했다.
  • 걔는 그렇게 유명한 정신과 의사도 아니었다.
  • 유명하긴 내가 더 유명했다.
  • 나는 방송국에서 자주 찾는 의사였다. 꽤나 예쁘장한 얼굴 덕에 팬클럽도 여럿 만들어졌다.
  • “아니. 내 이복 여동생 남편될 사람이거든요.”
  • 그가 점잖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내뱉은 믿기 어려운 문장 사이사이로 내 잡념들이 정신없이 튀어올라왔다.
  • ‘뭐라고. 내가 헛게 들리나. 술마시면 가끔 환청이 들리기도 한다던데.’
  • ‘아 근데 되게 저남자 몽롱하고 섹시하다.
  • 아닌가 지금 내 정신이 몽롱한 건가.
  • 오늘이 무슨 날이더라.
  • 아 내 전남편 약혼한 날이지.
  • 내가 그럼 이럴 때가 아니지. 하루빨리 더 멋진 놈이랑 재혼해서 복수해야지.
  • 바로
  • 저런! 남자랑!’
  •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디올 정장이 놀란듯 살짝 뒷걸음을 쳤다. 내 눈에 그의 검은색 넥타이에 적힌 christian dior이 선명하게 보였다.
  • 어디서 난 용기인지 내가 그의 디올 넥타이를 꽉 움켜잡았다. 당황한 그의 검은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리며 나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 나는 그 디올 넥타이를 내쪽으로 더 바짝 당겼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남자의 당황스러운 얼굴이 내 바로 앞으로 다가오고, 그의 깊은 향수 향이 내 몸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순간 몽롱해진 내 입술에서 성급한 보랏빛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 “그쪽. 나랑. 재혼할래요?”
  • 그와 동시에 무방비상태로 있던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내쪽으로 순식간에 바싹 다가왔다. 그의 놀란 두 눈동자가 호텔 바 조명의 붉은빛과 함께 어우러져 어지러웠다.
  • 그의 입술에 묻은 붉은색 레드와인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 디올 정장의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당혹스러운 숨결이 내입술에 와 닿았다.
  • 나도 모르게 그의 도톰하고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 어떻게든 이 남자에게 어필해서 빨리 재혼하고 싶었다. 내가 잘하는 게 뭐더라…
  • 아. 맞아 그거!!
  • “키스. 나 키스 그거 되게 잘하거든요.”
  •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나 정신과 의산데… 여러분 정신과 의사도 술마시면 정신은 잃습니다.
  • ***
  • 눈을 번쩍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 “아야아. 내 머리..”
  • 어제 마신 술이 이제야 깨는지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대체 어제 얼마 어치를 마신 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 눈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보였다.
  • ‘저런 커다란 샹들리에가 왜 내 방에 있지.’
  • 그러고 보니 여긴 내 방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레이스가 달린 침대이불과 어느 왕비가 쓸 것같은 규모의 커다란 침대. 창가에 달려있는 레이스 달린 고급 커튼.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이게 바로 호텔 스위트룸인가.
  • “설마 어제 내가!”
  • 벌떡 일어서서 내 지갑 안의 영수증을 뒤졌다.
  • “설마 내가 어제 홧김에 호텔 스위트룸을 긁은 거 아니겠…지? 이 호텔 스위트룸 1박에 500만 원이 넘던데. 이번달 살고 있는 아파트 전세금도 올려줘야 하는데. 월급날도 아직 한참 남았고. 또 대출금은 어쩌고… 하 어떻게 내 카드값.“
  • 미안하다 내 통장아. 돈만 들어갔다 하면 다시 홀쭉하게 빠져버리는구나.
  • “헉. 지금 몇시지?”
  • 옆에 걸린 시계를 봤다. 9시 50분이다.
  • “아읏. 미치겠네.”
  • 엉거주춤 일어나 옷가지를 챙겼다. 이상하게 입은 옷이 바뀌어 있었고 옷들이 테이블 위에 곱게개어져 있었다. 가방도 곱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 “꺄악. 지각이야. 어렵게 구한 페이닥터 자린데!”
  • 서둘러 호텔 침실을 나와 거실로 나갔다. 김민준과 같이 운영하던 병원을 정리한 이후 나는 청담동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페이닥터로 일하고 있었다. 병원 원장님을 위해 개미처럼 일하는 월급쟁이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각이라니.
  • 침실 밖의 거실은 널찍했다.
  • 커다랗고 푹신한 쇼파 사이로 다리를 꼰 누군가가 펼치고 있는 신문지가 보였다.
  • ‘뭐야. 뉴..욕 타임즈?’
  • 누구지. 설마 어제 호텔 바에서 술마신 비용 청구하러 온 호텔 지배인인가?
  • 그 때
  • 신문지가 접히면서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 고급진 은색 시계, 이니셜이 새겨진 화이트 와이셔츠, 날카롭게 다려진 검은 정장바지, 날카로운 턱선, 예민하고 섬세한 눈가, 여느 배우보다도 더 잘생긴 얼굴.
  • 헉.. 저 남자는?!!
  • 어제 그 디올 정장?!!!!!!!!
  • “일어났어요?”
  • 디올 정장이 태연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그가 셔츠가 거슬리는 듯 하이얀 소맷단을 걷어올렸다. 짧아진 소매끝으로 그의 단단한 팔뚝이 보였다. 그의 옆에 어제 그가 입고 있던 검은 정장 자켓이 눈에 띄었다.
  • 내 몸을 내려다 보았다.
  • 어제 입고 온 옷이 내 손에 들려 있고, 내가 입은 옷은 남자용 흰티셔츠였다.
  • ‘왜 저 남자가 이호텔방 안에 있지?’
  • 설마.
  • 나 저 남자랑 어젯밤……
  • 잤나?!
  • “그쪽 굉장히 늦게 일어나네요. 10분 안에 안깨면 가려고 했어요. 내가 굉장히 바빠서 말이죠.”
  • 그가 손목시계를 보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 그는 어제 입었던 검은 정장자켓을 옆에 벗어두고, 하얀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의 왼쪽가슴 한켠엔 붉은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 ‘설마. 저거. 내 입술?!’
  • 헙. 두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 “설마. 나 어제 그.그거 한 거 아니..죠?”
  • “뭘요.”
  • 남자가 눈 한쪽을 찡그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아. 저 눈 한쪽 찡그리는 표정. 어제 저 표정이 예뻐서 한참 쳐다봤던 게 기억났다.
  • “그러고 보니 내 옷이 왜 바뀌었지. 헉!!”
  • 내가 입을 손으로 막으며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 남자의 첼로 음과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분노를 참는 듯 이를 악무는 소리가 났다.
  • “그래요. 어제 여러 번 했죠. 질리도록. 이제 생각났어요?”
  • 남자의 잘난 얼굴에 순간 불쾌하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 나랑 여러 번 했다고? 그것도 질리도록? 난 술취해서 정신을 잃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