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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도둑이 되었다

  • 05. 도둑이 되었다.
  • 황태자와 나는 아지트를 나와 말을 타고 태자 궁으로 향했다.
  • 옆에서 걷는 황태자는 정면은 응시하다 가도, 이따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 날 보는 그의 눈빛에 따듯한 온기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전엔 알지 못했던 그의 피로감도 느껴졌다.
  • 펠르랭 가문과 케사르 황자로부터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쏟는 힘겨운 노력이.
  • 케사르 황자와의 권력 투쟁이 그만큼 치열하단 뜻이겠지. 나와 가족을 죽여야 했을 만큼.
  • 이쪽으로 고개돌린 황태자가 나직이 읊조렸다.
  • “처음이군. 비아테르와 나란히 걷는 것.”
  • ‘전하께서 그동안 절 피해 다니셨으니까요!’
  • 물론, 그렇게 날 지켜왔다는 것도 알아.
  • 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 “앞으론 그대를 멀리 두지 않을 거야.”
  • “저를 지켜주신 것 압니다. 헌데, 왜요?”
  • “새로운 대응이 필요해 졌으니까.”
  • “새로운 대응이요?”
  • 황태자가 곧장 이었다.
  • “그대가 내 근위대장이 된 이상 거리를 둘 순 없어. 저들도 더 경계할 테고.”
  • 그렇다 해도 의문점은 남는다.
  •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 까지 하는데?
  • “제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 “그대를 지키겠다고 나 자신과 약속했으니까!”
  • “그러니까, 왜요?”
  • ‘혹시, 케사르 황자처럼 전하도 제게 인도될 군대가 두려운 것입니까?’
  • 황태자의 군사력은 케사르 황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에겐 펠르랭 가문과 같은 지원세력이 없으니까.
  • ‘내게 영지를 주고, 대신, 군사적 지원을 얻어낼 전략인 건가?'
  • “전하! 혹시 동쪽 영지의 군대가 필요한 것입니까? 그래서 절 보호하신 겁니까?”
  • 질문을 들은 그의 표정이 좀 복잡해졌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충격이었다.
  • “나는 그대 부친의 보호를 받은적이 있소.”
  • “아버지의 보호요?”
  • 처음 듣는 얘기였다.
  • “20년 전, 반란 모의가 있었지. 그걸, 그대 부친인 파비앙 랑디 후작이 막았어.”
  • “아버지가 반란을 막아요?”
  • “그렇소.”
  • 20년 전이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재로 돌아가신 바로 그 해인데...
  • “반란 모의라면, 누군가 황제 폐하를 노렸단 뜻입니까?”
  • “그들이 노린 건 나였소.”
  • 그가 빠르게 덧붙였다.
  • “황태자인 나를 제거하고 폐하께서 서거하시면 황위를 차지할 생각이었소.”
  • 황태자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제께서 멀쩡하신데 황태자를 친다고 어떻게 황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 의아해 하는 내게 그가 담담히 설명했다.
  • “그때, 샤흘레 폐하께서 위중하셨거든.”
  • “폐하께서요?”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는 20년 전, 황제께서 사냥 중에 낙마해 한동안 의식불명에 빠져 계셨다고 덧붙였다.
  • “그러니까, 황제 폐하의 서거를 대비해 전하 대신 황위를 차지하려한 자가 있었다고요?”
  • “그렇소.”
  • 황태자가 덧붙였다.
  • “그들은 반란 개시 전, 그대 부친에게 불 개입 약속을 받아내려고 했소.”
  • “군사력이 막강한 아버지께 참전하지 않겠단 약속을 요구한 거군요?”
  • “그 전제가 충족돼야 완전한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었으니까.”
  • 그가 덧붙였다.
  • “그대 부친은 어떤 이유로도 반란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지.”
  • “그래서, 그들이 포기했나요?”
  • “포기했소. 때마침 샤흘레 황제께서 깨어나셨거든.”
  • 명분이 사라졌으니 반란을 밀고나가기엔 부담스러웠겠지.
  • 아버지의 의지와 황제의 회복이 황태자를 지킨 거였어.
  • 모르고 있었지만, 그때부터 나는 저들의 타겟이었던 거야.
  • “내가 그대를 지킨 이유요. 비아테르!”
  • 케사르 황자와 펠르랭 가문은 아직도 동쪽 국경의 군대가 두려운 거야.
  • 아버지로 인해 포기했던 과거가 나로 인해 또 반복될 까봐.
  • “케사르 황자님이 주동자였습니까?”
  • “펠르랭 가문이라고 해야 맞겠지. 형님은 그때 겨우 아홉 살이었으니까.”
  • 펠르랭 가문이 케사르 황자를 황위에 올리려고 한 거였군!
  • 그 순간, 이상한 우연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반란을 막은 그 해에 갑작스런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까.
  • 그때, 문득 바라본 황태자의 표정이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어이없고, 불쾌했다.
  • “내가 얼마 전에 잃어버린 것이 있는데, 그대가 가져갔더군.”
  • “예? 뭔가, 오해를 하신 듯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습니다.”
  • “그대가 가져간 게 확실하니, 발뺌하지 마시오.”
  • “아니, 전하!”
  • 황당해서 따지려는 데 황태자가 내 말을 막아 섰다.
  • “아지트 창가에 있던 화초 말이오?”
  • “그 쭈글해진 풀이요?”
  • “살아났던데!”
  • “살아났습니까?”
  • “살아났소.”
  • 오두막에서 나올 때 살피지 않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내 방 선인장도 살아났었다.
  • “똑같습니다. 전하!”
  • “뭐가?”
  • “제 방 선인장도 살아났거든요. 죽어서 버렸던, 아니, 어쨌든, 다시 푸르딩딩해졌습니다.”
  • 그때, 에르니엘 황태자가 확신을 담아 중얼거렸다.
  • “확실하군.”
  • 그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 “내 치유 능력이 그대에게 갔어.”
  • “치유 능력이요? 전하께 그런 게 있었습니까?”
  • “황가의 자손은 태어날 때 특별한 능력을 타고나지. 난 치유 능력을 타고났소.”
  • “어떻게 그런 일이?”
  •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 “못 믿는군. 정작, 본인이 증인이지 않나?”
  • “아! 그렇긴 하죠.”
  • 제가 빼박 증인이죠!
  • 근데, 능력이란 게, 막 옮겨 다녀도 되는 건가? 거기다, 왜 하필 나야? 나는 황족도 아닌데.
  • 그때, 기억 하나가 나를 사로잡았다.
  • 재판정에서 황태자의 검이 내 심장을 관통했을 때 느꼈던 그 저릿함. 무언가 심장으로 훅! 들어 온 것 같았던 그 느낌.
  • 그건가?
  • 그거네.
  • 황태자의 치유 능력이 그때 나한테 옮겨온 게 확실해. 회귀한 뒤부터 치유 능력이 나타난 것도 그 증거지.
  • 황태자의 표정이 너무 어둡다. 크게 낙담하고 있느게 분명했다.
  • 할 수만 있다면 돌려주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 위로라도 해줄까?
  • “전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전하께 다시 돌아갈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
  • “원래, 집 나가면 개 고생이라고... 능력이란 녀석도 저보단 전하가 편할 겁니다.”
  • “...!”
  • 넌지시 황태자를 보니, 위로가 먹히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는 날 사랑하잖아. 그러니까, 내 위로는 꿀보다 달콤할 거야.
  • “그래서 말씀인데요, 전하!”
  • “뭐지?”
  • “치유 능력은 죽은 풀도 살려낼 정도로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 “그렇지.”
  • “그럼, 자기 죽을 때도 자기가 자기를 막 살리고 하겠네요?”
  • “...!!!”
  • 황태자가 똥 먹은 표정이다. 더 하면, 한 대 칠 수도 있겠어.
  • 위로 실패!
  • 고개를 갸웃하며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 “이해할 수가 없군. 치유 능력이 어떻게 그대에게 옮겨 갔을까?”
  • “...그러게요.”
  • 당신의 검이 내 심장에 박혔으니까.
  • 옆에서 한숨을 내쉰 황태자가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부탁했다.
  • “비아테르! 오늘 일과 마치면 내 집무실에 들러주겠어?”
  • “예, 전하! 헌데,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 “그대가 와서 해줄 일이 있어.”
  • “...?”
  • 뭘, 해야 하는데? 손잡기? 키스하기?
  • 자신의 아지트에 데려가고, 나란히 걷고, 이젠 집무실에 와 달라, 부탁까지?
  • 이전의 황태자와는 확실히 다르네!
  • 그가 영지 반환 계획을 서두르면서 내 미래도 달라지고 있다.
  • 정면을 응시하면서 걷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아찔한 콧날과 그윽한 눈빛. 요동치듯 쿨럭이는 목젖마저도.
  • 그의 모든 것이 내게 스며들고 있을 때,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 “영지를 돌려받으면 떠날 건가?”
  •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 “나도 고민이군... 도둑을 보낼까, 잡을까?”
  • 도둑?
  • 나를 말하는 것 같은데... 엄밀히 말하면 무상 취득이지. 훔친 건 아니거든요!
  • 어쨌든, 나 때문에 고민된다 그거지?
  • 계속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