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영지를 돌려준다고?
- 04. 영지를 돌려 준다고?
- 오두막 내부엔 벽난로와 소파가 있었다. 창가엔 긴 테이블도 놓여 있었다.
- 황태자는 곧장 소파로 갔지만, 나는 창가 테이블로 향했다.
- 테이블 위엔 생기 없이 쪼그라져 있는 작은 화초가 하나 있었다. 들어 살펴보니 처음 보는 화초였다.
-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테이블에 던진 황태자가 물었다.
- “화초를 좋아하나?”
- “아닙니다... 그런데, 임명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전하!”
- 황태자의 건너편에 앉으면서 던졌다. 내가 주인공인 행사라 신경이 쓰여서.
- “걱정마시오. 늦지 않게 돌아갈 테니까.”
- “아, 예.”
- 안심하고서 진짜 궁금한 걸 물었다.
- “여긴 어딥니까?”
- “혼자 있고 싶을 때 오는 곳.”
- 그가 담담히 덧붙였다.
- “태자궁엔 나를 훔쳐보는 눈이 아주 많거든.”
- “아아. 아지트군요?”
- “아지트! 적절한 표현이군.”
- 펠르랭 가문이 심어 놓은 첩자들을 피해 오는 곳인 듯했다.
- 그는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 “내가 생각이 바뀌었소. 비아테르!”
- “무슨 생각이 바뀌셨단 말씀입니까?”
-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 설마, 근위대장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겠다는 건가? 그래서, 임명식이 코앞인 지금, 여기로 데려온 거야?
- 안돼!
- 건너편에서 황태자가 피식 웃었다. 마치 내 생각을 다 꿰뚫어 본 것 같은 눈빛으로.
- “그대가 걱정하는 그런 상황은 아닐 텐데!”
- “제가 무슨 걱정을 했다고...”
- 그러세요?
- 눈치 빠른데!
- “어차피 형식일 뿐이잖아. 무엇보다, 난 벌써 임명장에 서명을 했거든.”
- “아아...”
- 서명을 하셨구나! 그럼, 끝난 거지.
- 그러고 보니, 에르니엘 황태자와 나, 둘 뿐이네. 오붓한 걸.
- 하지만, 맞은 편 황태자의 얼굴은 어딘가 비장해 보였다.
- “다음 달에, 동쪽 국경으로 시찰을 떠날 생각이오. 그대도 동행하시오. 근위대장 비아테르!”
- “알겠습니다. 전하!”
- 지난 생에 이미 경험했던 일이었다. 근위대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찰을 떠났으니까.
- 열흘 간의 시찰을 끝내고 귀경한 바로 그날 밤, 내 가족은 죽임을 당했었지. 복수를 하려고 태자궁에 난입했던 나는 감옥에 갇혔고.
- ‘하지만, 범인은 케사르 황자였지!’
- 죽어가던 이모는 왜 황태자를 거론했을까? 마치 그가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 지난 과오가 가슴을 저며왔다. 무거운 마음으로 황태자를 봤을 때, 그의 단정한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처럼 단아한 그의 입술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 순간, 재판정에서 그와 나눈 키스가 떠올랐다. 달콤했던 키스가.
- 내 감정은 급속하게 그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러면 곤란한데.
-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는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방치할 순 없었으니까.
- “흠흠. 흠흠흠.”
- 헛기침을 하면서 키스를 떠올리던 생각을 떨쳐내려고 했다.
- 그런, 나를 황태자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 난감하지만 이럴 땐 뻔뻔하게 나가는 게 상책!
-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전하!”
-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더운가? 그대 볼이 붉은데!”
- “...아닐 걸요!”
- 이런!
- “...아아닙니다. 전하!”
- 달아오른 볼을 양손으로 감싸면서 부인했다. 그러자, 황태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볼이 붉은 건 처음 보는군."
- 아래로 시선을 내린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 "그래서, 귀엽나?”
- 귀엽데...!
-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힐끗 그를 보자 그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 ‘예쁘게 웃네.’
- 그런데, 그때,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 ‘다르다!’
- 지난 생과 달라!
- 그땐, 임명식 날 황태자가 날 찾아오지 않았어!
- 과거가 바뀌었다. 더 이상 같은 날이 아니야.
- 주머니를 뒤지던 황태자가 무언가를 내민 건 바로 그때였다. 가죽끈으로 돌돌 만 종이로 편지 같았다.
- 그것을 받아 들고 황태자를 바라봤다.
- “풀어봐!”
- 종이를 열자, 네 명의 이름이 나타났다.
- 칼리시 로몬테, 제르망 가페, 필립 올랑드, 에두르스 샤를.
- 의아해 바라보자 황태자가 설명했다.
- “동쪽 영지의 저택 관리인과 군대 지휘관들이오.”
- “동쪽 영지라면...?”
- 내 아버지의 영지였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황실 소유지.
- “그들은 당신 부친의 부관이던 자들이오.”
- “이 네 명이요?”
-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인 후, 덧붙였다.
- “다음 달에 시찰 가면, 그대도 그들과 만날 거요.”
- “이들을 제가요?”
-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었다.
- “그들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 “때라니요? 어느 때를 말씀하십니까?”
- “진짜 주인에게 돌아갈 때.”
- 진짜 주인? 황실이 주인이잖아?
- 혹시, 저들은 아직도 아버지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걸 황태자도 인정하고?
- 하지만, 아버진 돌아가셨지!
- 그럼, 나를 말함인가? 확인해 보자.
- “제 부친은 안 계십니다. 전하!”
- “비아테르. 그대가 있지 않소?”
- “여기 네 사람이 찾는 진짜 주인이 저입니까?”
- “그렇소, 그대가 파비앙 랑디 후작의 유일한 상속녀니까!”
- 내가 맞구나!
- “그대도 알다시피 동쪽 영지는 에히르 왕국, 시킨 왕국과 국경을 접한 요충지요.”
- “요충지가 왜요?”
- “국경을 접한 영지는 원로회의 상속 기준이 엄격하지.”
- “...?”
- 상속기준이 엄격해서 내가 상속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건가?
- 다섯 살짜리 영주에게 국경을 맡기기엔 불안했다고!
- 좀 어이가 없었지만,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사실 국경의 군대를 지휘하기엔 난 어렸으니까.
- “이제 그대 부친의 영지를 돌려주겠소. 비아테르!”
- “예에?”
- 갑자기 왜? 하지만,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그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던가? 그래서 돌려주려는 것이리라.
- 근위대장으로 뽑고, 선물로 영지도 돌려주고... 멋진 걸!
- “선물까지 주실 줄 몰랐습니다. 전하!”
- “선물이라니?”
- 황태자가 정색하며 내 추측을 부인했다.
- “비아테르는 근위대장이 됨으로써 군대를 지휘할 능력을 증명했지. 그래서 돌려주려는 거요.”
- “아아, 근위대장이 돼서... 였군요!”
- 민망하구나!
- 추측은 어긋났지만, 어쨌든 환영할 일이다. 아버지의 영지를 돼 찾게 될 줄은 몰랐는데.
- 무릎 사이에 맞잡은 손을 얹은 황태자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공작새처럼 우아했다.
- 이젠 내가 다가가야겠다. 그에게 할 발짝 씩 내딛다 보면, 늘 그래왔던 사람처럼 나도 그에게 스며들겠지.
- “영지는 시찰가서 반환하지.”
- “전하의 시찰 중에 영지를 돌려주시겠단 말씀입니까?”
- “그렇소! 왜, 싫은가?”
- “아닙니다."
- 예상보다 빨리 영주가 될 것 같아 놀랍고 반가워서 그러죠.
- 근데, 지난 생엔 영지 반환을 몰랐다. 그런데, 이번 생엔 황태자가 반환을 서두르고 있다.
- 그리고, 그건 마치 새롭게 추가된 변수처럼 내 미래를 바꿔 놓고 있다.
- 바로 그때, 어떤 깨우침이 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 ‘혹시, 케사르가 우릴 공격한 이유가, 영지 반환 때문인가?’
- 그는 내게 영지가 반환된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 몰라. 그에겐 펠르랭 가문이 심어놓은 첩자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으니까.
- 그거였구나. 영지 반환!
-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나와 가족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영지반환 때문이라는 것을.
- 시찰을 떠날 때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케사르의 합류가 이상했었다. 그리고, 시찰지에서 마지막 밤에 본 그는 더 이상했었지.
- 내내 평화롭던 그가 마지막 날 밤엔 당황한 사람처럼 허둥댔고, 몹시 불안해 보였으니까.
- 어쩌면, 케사르는 그날 영지 반환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 영지 반환은 곧 군대의 반환을 의미하기도 하지.
- 영지와 함께 막강한 군대를 돌려받게 된 나를 그들은 위협으로 간주한 거야.
-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아버지께 반란이 좌절된 것처럼 내게도 그렇게 될까 봐.
- 그래서, 내 가족을 죽이고 나를 함정에 빠뜨렸구나.
- 재판장을 매수해 내게 참수형을 내리게 한 것도 그래서고!
- ‘그래서, 나를 죽인 거였어.’
- 황위를 찬탈하려는 케사르 황자와 펠르랭 가문에게 내 군대의 등장은 껄끄러운 존재다.
- 나는 케사르에게 적대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지지자도 아니다. 그러니, 만에 하나 내가 적이 되는 상황도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 그래서, 죽인 거였어. 영지를 돌려받지 못하게 하려고!
- 그런 자들로부터 황태자가 날 지켜왔어!
- ‘내가 두려운 거구나? 케사르 황자!’
- 이제 내가 나아갈 방향은 분명해졌다.
- 나는 내게 주어진 힘으로 에르니엘 황태자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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