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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녀가 돌아왔다

상속녀가 돌아왔다

개미비행

Last update: 2021-11-15

제1화 상속녀가 돌아왔다

  • 시야가 흐릿했다. 눈을 비비고 주변을 둘러보니, 내 방, 내 침대였다.
  • 그런데... 왜, 남의 둥지에 날아든 새처럼 낯설지?
  • 침대 옆 탁자 위엔 말라비틀어진 선인장이 놓여 있다.
  • '저건, 죽어서 진작에 버린 건데... 누가 다시 갔다 놨을까?'
  • 누운 채 화분을 들었다. 요리조리 살펴봐도 버렸던 선인장이 확실했다.
  • 그 순간, 예리한 칼날이 내 심장에 훅 들어 오는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 “아악!”
  • 비명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 ‘방금 그 잔인한 기억은 뭐지? 검이 내 심장을 뚫었어!’
  •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자 이내 의식 저편에 잠들어 있던, 재판정의 기억이 떠올랐다.
  • 나는 황태자를 죽이려고 했었고, 실패한 뒤 체포되었다.
  • 재판정에서 끌려간 나는 에르니엘 황태자로부터 자결을 명 받았고, 그의 검으로 내 심장을 찔러 자결했었다.
  • ***
  • 양쪽에서 강압적으로 내 팔을 붙잡은 기사들이 황궁 재판정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 멀리 구경꾼들 사이에 서있는 에르니엘 황태자가 보였다.
  • 곧장 달려가 그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했지만, 기사들에게 제압당한 나는 플리르 재판장 앞에 거칠게 팽개쳐졌다.
  •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엔 황태자의 이복형인 케사르 황자도 있었다.
  • 그들은 사이가 좋지 않은 형제를 증명하듯 십여 걸음이나 떨어져 서 있었다.
  • 평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황태자의 보라색 머리칼과 자수정을 닮은 눈빛이 역겨웠다.
  • 고아인 내게, 외할아버지와 이모는 유일한 가족이었는데 황태자가 죽였다.
  • '에르니엘 드 몽트부르 황태자. 이 살인자!'
  • 사건이 벌어진 그 날은, 내가 황태자와 함께 떠났던 동쪽 국경 시찰에서 돌아온 날이었다.
  • 죽어가던 이모는 ‘황태자가...’ 라는 짧은 단서를 남기고 숨을 거뒀다.
  • 나는 분노에 사로잡혔고, 내 손으로 황태자를 죽여 복수하겠단 생각밖에 없었다.
  • 나는 곧장 태자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복수는커녕 황태자와 근위대에게 붙잡혀 구금되고 말았다.
  • 오늘은 황태자의 시해 미수범으로 채포된 나의 첫 재판이 열리는 날이다.
  • 5일 전까지 에르니엘 황태자의 근위대장이었던 내가, 황태자 시해 미수범이 되어 재판정에 끌려온 것이다..
  • '근위대장 비아테르 랑디!' 그게 나였다.
  • 나는 에르니엘 황태자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그런데, 황태자의 눈빛은 어째서 침울해 보이는 걸까?
  • ‘대체, 그 안 어울리는 눈빛은 뭐냐? 이 살인자!’
  •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고, 마치 한편의 희극 같았다.
  • 플리르 재판장은 이미 결과를 정해놓은 듯했고, 내 호소는 철저히 묵살됐다.
  • 그는 오로지 내게 참수형을 선고하는데만 혈안이 돼 있었으니까.
  • 만족스런 표정으로 참수형이 명기된 판결문을 집어 든 재판장은, 케사르 황자를 쳐다봤고,케사르도 야릇한 미소로 화답했다.
  • 판결문을 읽어 가는 재판장은 누군가를 한 방 먹일 준비를 마친 자 같았다.
  • 짜릿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시선이 에르니엘 황태자에게 향했다.
  • "전하! 근위대장에게 참수형을 선고하는 행운은 전하께 양보하겠습니다.”
  • 재판장은 곧장 들고 있던 판결문을 관리에게 건넸다. 황태자께 전하라는 눈짓과 함께.
  • 그러나, 황태자의 눈은 분노에 이글거리며 재판장을 노려봤다.
  • 황태자는 비아테르 근위대장이 투옥된 직후 샤흘레 황제를 찾아가 애원했다. 그녀를 살려 달라고.
  • 하지만, 황제는 단호했다.
  • “아바마마! 비아테르를 살려주십시오. 그녀는 죄가 없습니다.”
  • “어림없는 소리! 널 시해하려한 근위대장을 살려줄 수 없다.”
  • 관리가 내민 판결문을 낚아챈 황태자는 그것을 들어 쫙쫙 찢은 뒤 허공에 흩뿌렸다.
  • 그 모습에 재판장과 구경꾼들 모두 경악했다.
  • 그때, 눈빛이 결연해진 황태자가 방청석을 바라보자 숨어있던 검객 둘이 달려와 나를 엄호했다.
  • 근위대 조장 나탄 훈트와 제시넬 카친이었다.
  • ‘너희들이 여긴 어떻게?’
  • 제시넬은 나를 부축해 세웠고, 나탄은 호위했다.
  • 황태자는 재판정 입구로 가, 출입문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비키라고 명령했다.
  • 그 순간, 서 있을 기력조차 없던 나는 바닥에 고꾸라졌고, 황태자가 달려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 하지만, 나는 안간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 “더러운 손 치워. 에르니엘 황태자!”
  • “비아테르!. 일단은 여기서 나가지. 원망은 살아야 할 수 있으니까!”
  • 황태자는 나를 안고 출입문 앞으로 갔다. 나는 의아했다. 내 가족을 죽인 황태자가 왜, 나를 구하려고 하는지.
  • 그런데, 이런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수백 명의 군인들이 재판정 문을 막아섰다.
  • 그리고, 의기양양한 케사르 황자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황태자를 도발했다
  • “전하께서 법을 농락하시렵니까?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죄인을 빼돌리려 하다니요?”
  • “비아테르가 함정에 빠졌다는 건, 형님이 잘 알지 않습니까?”
  • “글쎄요... 저는 근위 대장이 전하를 시해하려 했다고만 들었습니다만.”
  • 냉소를 머금은 케사르 황자는 능구렁이처럼 느물댔다. 분노에 치를 떨던 황태자도 반격했다.
  • “비아테르가 이대로 죽게 하진 않아!”
  • “예상대로 무모하시군요. 하지만, 재판정은 포위됐고, 전하는 못 나가십니다.”
  • 황태자는 나를 왼쪽 가슴에 기대 세우고, 검을 빼 케사르 황자의 목에 겨눴다.
  • “황태자의 명령이다! 비켜!”
  • “황제 폐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포기하시라고!”
  • 케사르 황자는 그 자리에서 버텼고, 황태자는 더욱 분노했다.
  • “왜, 이렇게까지 해? 황태자 자리가 탐나면 정정당당하게 뺏어!”
  •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 근데, 왜 나는 저들의 대화가 이상하지?
  • 내 가족을 죽인 범인이 황태자가 아니었나?
  • 그럴 리가... 이모는 분명 ‘황태자가...’ 라고 했단 말이야!
  • 어리둥절한 나는 케사르 황자를 바라봤다. 대화의 흐름으로 볼 때, 그도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 내 시선을 감지한 케사르는 '이제야 알겠어?' 하고 반문하는 듯한 표정으로 날 봤다.
  • ‘아아!’
  • 할아버지와 이모를 죽인 건, 황태자가 아니라 케사르 황자였구나!
  • 내가 함정에 빠진 거였구나!
  • 순간, 인내심이 다한 황태자는 케사르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 친위대를 대동한 황제께서 재판정에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 “멈춰라. 에르니엘 황태자!”
  • “아바마마!”
  • 황태자는 바닥에 나를 앉힌 뒤, 그도 황제 앞에 꿇어앉았다.
  • 황제는 저승사자와 같은 근엄하고 굳은 표정으로 황태자와 나를 번갈아 보다 소리쳤다.
  • “제국의 존엄인 황태자가 이 무슨 추태냐?”
  • “아바마마! 비아테르는 죄가 없습니다. 살려주십시오.”
  • “안 된다! 근위대장은 본분을 망각하고 너를 공격하지 않았느냐?”
  • “하오나, 아바마마...”
  • “황태자는 그 입 닫으라!”
  • 샤흘레 황제는 황태자의 말을 자른 뒤, 친위대에 명령했다.
  • “에르니엘 황태자를 일으켜 세워라!”
  • 친위대원들이 황태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황태자 옆으로 다가간 황제가 속삭였다.
  • “황태자란 권위는 내가 주었지만, 지키는 것은 네 몫이다. 적대 세력에게 도발의 빌미를 주고 있다는 걸 모르겠느냐?”
  • “폐하! 하오나...”
  • “그만!”
  • 황태자의 말을 가로막은 황제가 다시 속삭였다.
  • “비아테르 근위대장의 처분을 네게 맡기마. 허나, 반드시 죽여야 한다!”
  • “아니되옵니다. 폐하!”
  • “만약, 또 경솔한 짓을 한다면, 비아테르는 가장 끔찍한 형벌로 죽게 될 것이다.”
  • 못 미더운 듯 미간에 주름을 잡은 황제가 덧붙였다.
  • “너도 비아테르가 고통스럽게 죽길 바라진 않겠지?”
  • 에르니엘 황태자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 이윽고 황제는 재판정의 모든 이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쳤다.
  • “지금부터 비아테르 근위대장에 관한 처분은 에르니엘 황태자에게 일임하겠다.”
  • 샤흘레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모두가 황태자를 바라봤다.
  • 고개를 떨군 황태자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 그의 눈엔 눈물이 그렁했고, 나는 사과했다.
  • “전하가 아닌 줄 몰랐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 “그대는, 그대를 지키지 못한 나를 용서하지 마시오... 사랑해, 비아테르.”
  • 뭐? 사랑? 갑자기?
  • 잠시, 죽음의 공포마저 잊게 할 만큼 강렬한 고백이었다.
  • '당신은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 근위대에 입단한 첫날부터 황태자는 나를 멀리했으니까.
  • 황태자는 고개를 푹 숙였고,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다부진 어깨가 힘없이 흔들렸으니까.
  •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애써 웃어주었다. 조금이라도 그가 감당할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으니까.
  • 그 순간, 채 가두지 못한 울음이 황태자의 입술 사이로 ‘흡’ 하고 터져 나왔다.
  • 나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의 사랑과 슬픔을 알게 되었다.
  • 그 순간, 봄날의 햇살처럼 다가온 황태자가 내 입술에 키스했다.
  • '아~ 따듯하고 달콤해.'
  • 모든 것이 끝장나버린 순간에, 황태자의 사랑이 찾아왔다.
  • 그렇게 우리의 입맞춤은 마지막을 알리는 의식이 되었고, 앞에 검을 내려놓은 황태자는 천천히 일어섰다.
  •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 지 알았고, 그 또한, 나를 위한 배려인 것을 알았다.
  • 눈물을 떨구며 돌아선 황태자는, 슬픈 사슴처럼 울음 섞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 “비아테르 랑디, 자결하라!”
  • 나는 황태자가 내려놓은 검을 들어, 내 심장 깊숙이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