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을 씻고 물을 끓여놓으니 마침 손님이 도착하였다. 커피를 타고 차를 우리는 일은 솜씨가 서툴렀지만, 결과적으로 완성을 하였다. 손님을 보내고 나니 주문한 점심밥이 도착했다는 전화가 옆의 비서실에 걸려왔다.
정율은 총망하게 티테이블을 정리하고 배달된 음식을 가져왔다. 그녀는 주문한 음식 보따리를 펼쳐보니 음식이 2인분으로 되어 있어서 살짝 놀랐다. 최시환이 혼자서 2인분의 양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처지가 참 가련하다고 생각되었다. 배 터지는 사람과 배곯는 사람의 차이를 실감할 정도였다..
“대표님, 식사하세요. 좀 있다 제가 와서 치울게요.”
정율은 말을 마치고 점심 먹으러 떠나려 하였다. 최시환이 다 먹기를 기다리다 간 점심때를 놓칠 수 있었다.
최시환은 사무용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묵묵히 말했다.
“어디 가? 너도 같이 앉아서 먹어.”
정율은 흠칫 놀라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2인분을 시킨 것이 자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에 희비가 반반씩 엇갈렸다. 그녀보고 선택하라 하면 혼자 나가서 먹는 게 편했다. 상사와 같이 앉아 먹으면 부담스러워 소화불량이 걸릴 것 같았다. 최시환은 껑충한 몸을 흐느적거리면서 티테이블 옆에 와서 소파에 앉은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여기와 식사를 해. 지시할 내용이 있어.”
“네.”
정율은 거절할 엄두를 못 낸 채 티테이블에 돌아와 그의 맞은 켠 소파에 앉았다.
“점심시간이 십오분이나 넘었는데, 넌 배고프지 않아?”
최시환은 밥 한술을 떠먹으면서 정율을 힐끔 쳐다보고 물었다.
“네. 배고파요.”
정율은 말을 마치고 신속하게 도시락을 들고 먹기 시작하였다. 일이 이렇게 된바 하곤 만사를 제쳐놓고 배를 채워야만 했다. 점심을 먹어야 오후 일들을 박력 있게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최시환이 식사를 느리게 하는 것 같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도시락 하나를 뚝딱 비웠다. 그가 식사를 마칠 때 정율은 아직 절반도 먹지 못하였다. 정율은 수저를 놓을까 말까 살짝 고민하다가 체면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먹었다.
“회사의 입사 수속은 다 되었어?”
최시환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네.”
정율은 입안에 밥알을 씹다 말고 급히 대답했다.
“오후 세 시에 일손을 놓고 나하고 같이 옷 사러 가. 향후 나의 사적 업무와 접대의 일을 도맡아 해.”
최시환은 목구멍으로 음식을 넘기려는 정율을 쳐다보면서 기계적으로 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감정적 요소가 적었지만, 탄력적이어서 듣기가 편했고 흡인력이 있었다. 그는 회사 대표이고 그가 지시하면 직원은 그대로 따라야 했다.
“알겠습니다.”
정율은 명쾌하게 답하였다. 그녀는 최시환이 왜 이 시점에서 옷을 구매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혹시 그가 무슨 타격이라도 받아 새 출발을 결심하는 게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보았다.
“날 따라와!”
최시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율은 도시락을 먹다 말고 냉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최시환은 사무 책상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산수화가 걸린 벽 옆에 위치한 스위치를 살짝 눌렀다. 신기하게도 벽에서 암실로 통한 문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자동으로 열리었다. 은폐된 밀실처럼 보이었고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장소였다. 안쪽을 바라보니 자그마한 침실이었고 그 안에는 푹신푹신한 호화형 침대가 놓여있었다.
“대표님, 여긴 어딘가요?”
정율은 의혹에 찬 채 물었다.
“이곳의 청결도 네가 도맡아 해. 나 지금 휴식할 테니 정확히 십오 분 후에 깨워줘.”
최시환은 그녀가 알아듣든 말든 자기 말을 내뱉고는 침대 편으로 걸어갔다. 문뜩 뭐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사무실 통풍을 잘해 놔. 음식 냄새가 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고.”
“네, 알겠습니다.”
정율은 답하고 현재의 시간을 기록하였다. 십오 분 후에 그를 깨우기 위해서였다.
‘돈 많은 사람은 참으로 생활을 향수할 줄 아는구나. 십오분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휴식하다니.’
정율은 시간의 긴박성을 느끼고 신속하게 사무실에 가서 창문을 열고 통풍을 시켰다. 그리고 티테이블에 돌아와 아까 먹다 남은 밥을 마저 다 먹고 그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였다. 장금연이 준 리스트를 다시 확인하고는 최시환을 위해 모카커피를 타서 그의 사무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리스트 서류와 시계를 번갈아 보면서 그를 깨울 시간을 기다리었다.
문뜩 정율의 머릿속에 밀실에서 본 침대가 떠오르면서 감탕질이란 엉큼한 단어가 생각나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이때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을 했다. 윤하가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신첩은 연예팀에 배치받았나이다. 좋게 말하면 취재 편집 담당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연예계 기생충이야. 거물급 최시환의 정보가 몹시 필요해.”
정율은 윤하가 아직 정식 기자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자기네 회사의 뒤를 캘 궁리를 하고 있어 조금 걱정이 되었다.
“비밀유지 계약을 해놓았어. 날 죽일 꼼수를 부리지 말고 착실하게 일이나 해!”
정율은 카카오톡에 답신을 날렸다. 두 사람은 항상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윤하의 메시지가 또 왔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알기나 해? 넌 어때?”
“오리무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어. 쉬운 게 아니야. 저녁에 집에 가서 얘기해.”
정율은 윤하의 카카오톡에 답신하였다. 그녀는 출근 장소에서 윤하와 카카오톡을 오래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윤하가 이번 회사를 잘 찾았다고 생각하였다. 남의 뒷이야기를 캐 길 좋아하는 윤하가 연예계 기자라는 신분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최시환을 깨울 시간이 아직 3분 남았다. 그녀는 허리를 쭉 펴고 리스트 서류에서 최시환의 개인 애호 방면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모든 물건은 정리 정돈을 잘할 것, 그리고 청결을 항상 유지할 것!”
리스트에 적힌 이 구절을 바라보면서 정율은 최시환이 혹시 결벽증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였다. 만일 진짜로 결벽증이 있다면 세부적인 면에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였다. 지정한 시간을 일 분 남겨놓고 그녀는 그를 깨우리라 작심하였다. 리스트를 보면서 일부 세부적 사항은 그에게 직접 물을 필요성을 느끼었다. 장금연을 통해 묻는 것보다 그에게 직접 묻는 것이 더 정확하고 효과적이었다. 그녀는 아까의 장소에 와서 스위치를 누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었다. 문밖에서 안에 대고 소리친다는 것이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침대 가에 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깨날 때가 되었어요.”
침대 위에는 성인 남성이 어린애처럼 귀엽게 자세를 취하고 자고 있었다. 두 팔로 팔베개를 하고 있었는데, 능각이 선명한 얼굴에는 기다란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거리고 있었다. 크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자기 아들이 잠자는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녀는 자기 아들과 비교하는 잡생각을 물리치고 다시 한번 불렀다.
“대표님, 깨어나세요.”
그녀의 눈은 최시환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이 시각 그녀는 잘 생기고 귀여운 미남자를 얼굴을 흔상하는데 도취해 있었다. 마음 한편으로 그가 깨어나면 혹시 성깔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