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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오찬을 같이 하다

  • 잔을 씻고 물을 끓여놓으니 마침 손님이 도착하였다. 커피를 타고 차를 우리는 일은 솜씨가 서툴렀지만, 결과적으로 완성을 하였다. 손님을 보내고 나니 주문한 점심밥이 도착했다는 전화가 옆의 비서실에 걸려왔다.
  • 정율은 총망하게 티테이블을 정리하고 배달된 음식을 가져왔다. 그녀는 주문한 음식 보따리를 펼쳐보니 음식이 2인분으로 되어 있어서 살짝 놀랐다. 최시환이 혼자서 2인분의 양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처지가 참 가련하다고 생각되었다. 배 터지는 사람과 배곯는 사람의 차이를 실감할 정도였다..
  • “대표님, 식사하세요. 좀 있다 제가 와서 치울게요.”
  • 정율은 말을 마치고 점심 먹으러 떠나려 하였다. 최시환이 다 먹기를 기다리다 간 점심때를 놓칠 수 있었다.
  • 최시환은 사무용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묵묵히 말했다.
  • “어디 가? 너도 같이 앉아서 먹어.”
  • 정율은 흠칫 놀라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2인분을 시킨 것이 자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에 희비가 반반씩 엇갈렸다. 그녀보고 선택하라 하면 혼자 나가서 먹는 게 편했다. 상사와 같이 앉아 먹으면 부담스러워 소화불량이 걸릴 것 같았다. 최시환은 껑충한 몸을 흐느적거리면서 티테이블 옆에 와서 소파에 앉은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 “여기와 식사를 해. 지시할 내용이 있어.”
  • “네.”
  • 정율은 거절할 엄두를 못 낸 채 티테이블에 돌아와 그의 맞은 켠 소파에 앉았다.
  • “점심시간이 십오분이나 넘었는데, 넌 배고프지 않아?”
  • 최시환은 밥 한술을 떠먹으면서 정율을 힐끔 쳐다보고 물었다.
  • “네. 배고파요.”
  • 정율은 말을 마치고 신속하게 도시락을 들고 먹기 시작하였다. 일이 이렇게 된바 하곤 만사를 제쳐놓고 배를 채워야만 했다. 점심을 먹어야 오후 일들을 박력 있게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겉으로 보기엔 최시환이 식사를 느리게 하는 것 같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도시락 하나를 뚝딱 비웠다. 그가 식사를 마칠 때 정율은 아직 절반도 먹지 못하였다. 정율은 수저를 놓을까 말까 살짝 고민하다가 체면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먹었다.
  • “회사의 입사 수속은 다 되었어?”
  • 최시환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 “네.”
  • 정율은 입안에 밥알을 씹다 말고 급히 대답했다.
  • “오후 세 시에 일손을 놓고 나하고 같이 옷 사러 가. 향후 나의 사적 업무와 접대의 일을 도맡아 해.”
  • 최시환은 목구멍으로 음식을 넘기려는 정율을 쳐다보면서 기계적으로 말을 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감정적 요소가 적었지만, 탄력적이어서 듣기가 편했고 흡인력이 있었다. 그는 회사 대표이고 그가 지시하면 직원은 그대로 따라야 했다.
  • “알겠습니다.”
  • 정율은 명쾌하게 답하였다. 그녀는 최시환이 왜 이 시점에서 옷을 구매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혹시 그가 무슨 타격이라도 받아 새 출발을 결심하는 게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보았다.
  • “날 따라와!”
  • 최시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율은 도시락을 먹다 말고 냉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최시환은 사무 책상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산수화가 걸린 벽 옆에 위치한 스위치를 살짝 눌렀다. 신기하게도 벽에서 암실로 통한 문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자동으로 열리었다. 은폐된 밀실처럼 보이었고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장소였다. 안쪽을 바라보니 자그마한 침실이었고 그 안에는 푹신푹신한 호화형 침대가 놓여있었다.
  • “대표님, 여긴 어딘가요?”
  • 정율은 의혹에 찬 채 물었다.
  • “이곳의 청결도 네가 도맡아 해. 나 지금 휴식할 테니 정확히 십오 분 후에 깨워줘.”
  • 최시환은 그녀가 알아듣든 말든 자기 말을 내뱉고는 침대 편으로 걸어갔다. 문뜩 뭐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 “사무실 통풍을 잘해 놔. 음식 냄새가 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고.”
  • “네, 알겠습니다.”
  • 정율은 답하고 현재의 시간을 기록하였다. 십오 분 후에 그를 깨우기 위해서였다.
  • ‘돈 많은 사람은 참으로 생활을 향수할 줄 아는구나. 십오분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휴식하다니.’
  • 정율은 시간의 긴박성을 느끼고 신속하게 사무실에 가서 창문을 열고 통풍을 시켰다. 그리고 티테이블에 돌아와 아까 먹다 남은 밥을 마저 다 먹고 그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였다. 장금연이 준 리스트를 다시 확인하고는 최시환을 위해 모카커피를 타서 그의 사무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리스트 서류와 시계를 번갈아 보면서 그를 깨울 시간을 기다리었다.
  • 문뜩 정율의 머릿속에 밀실에서 본 침대가 떠오르면서 감탕질이란 엉큼한 단어가 생각나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이때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을 했다. 윤하가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 “신첩은 연예팀에 배치받았나이다. 좋게 말하면 취재 편집 담당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연예계 기생충이야. 거물급 최시환의 정보가 몹시 필요해.”
  • 정율은 윤하가 아직 정식 기자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자기네 회사의 뒤를 캘 궁리를 하고 있어 조금 걱정이 되었다.
  • “비밀유지 계약을 해놓았어. 날 죽일 꼼수를 부리지 말고 착실하게 일이나 해!”
  • 정율은 카카오톡에 답신을 날렸다. 두 사람은 항상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 윤하의 메시지가 또 왔다.
  •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알기나 해? 넌 어때?”
  • “오리무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어. 쉬운 게 아니야. 저녁에 집에 가서 얘기해.”
  • 정율은 윤하의 카카오톡에 답신하였다. 그녀는 출근 장소에서 윤하와 카카오톡을 오래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윤하가 이번 회사를 잘 찾았다고 생각하였다. 남의 뒷이야기를 캐 길 좋아하는 윤하가 연예계 기자라는 신분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최시환을 깨울 시간이 아직 3분 남았다. 그녀는 허리를 쭉 펴고 리스트 서류에서 최시환의 개인 애호 방면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 “모든 물건은 정리 정돈을 잘할 것, 그리고 청결을 항상 유지할 것!”
  • 리스트에 적힌 이 구절을 바라보면서 정율은 최시환이 혹시 결벽증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였다. 만일 진짜로 결벽증이 있다면 세부적인 면에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였다. 지정한 시간을 일 분 남겨놓고 그녀는 그를 깨우리라 작심하였다. 리스트를 보면서 일부 세부적 사항은 그에게 직접 물을 필요성을 느끼었다. 장금연을 통해 묻는 것보다 그에게 직접 묻는 것이 더 정확하고 효과적이었다. 그녀는 아까의 장소에 와서 스위치를 누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었다. 문밖에서 안에 대고 소리친다는 것이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침대 가에 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대표님, 깨날 때가 되었어요.”
  • 침대 위에는 성인 남성이 어린애처럼 귀엽게 자세를 취하고 자고 있었다. 두 팔로 팔베개를 하고 있었는데, 능각이 선명한 얼굴에는 기다란 속눈썹이 천천히 움직거리고 있었다. 크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자기 아들이 잠자는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녀는 자기 아들과 비교하는 잡생각을 물리치고 다시 한번 불렀다.
  • “대표님, 깨어나세요.”
  • 그녀의 눈은 최시환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이 시각 그녀는 잘 생기고 귀여운 미남자를 얼굴을 흔상하는데 도취해 있었다. 마음 한편으로 그가 깨어나면 혹시 성깔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