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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방패막

  • 정율은 동작이 약삭빠르게 사무실의 집기들을 손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닦았다. 최시환의 사무 책상 뒤에는 진열대가 하나 있었는데, 진열대에는 정교하게 만든 청자기 꽃병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꽃병은 조형이 아름답고 색상이 짙고 광택이 났다. 특히 꽃병에 새겨진 도안은 정율의 예술적 세포를 자극하였다.
  • “정말 아름다운 청자기야!”
  • 정율은 청자기를 보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녀가 마른 수건으로 꽃병을 닦으려 하는 찰나, 사무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껑충한 검은 그림자가 정율한테 다가왔다.
  • “뭣 하고 있어?”
  • 최시환의 차가운 목소리가 정율의 귀가에 들렸다.
  • “아! 저 지금 청소하고 있어요.”
  • 정율은 그 말에 깜짝 놀라 긴장된 손을 움츠린다는 것이 꽃병을 슬쩍 다치었다.
  • “아!”
  • 꽃병이 흔들 넘어지고 있었다. 그녀와 최시환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 정율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 났다. 청자기 꽃병 가격이 어마어마할 터인데 파손된다면 어쩌나 하는 공포가 쏟아졌다. 당장 배상할 처지도 안되고, 설사 급여에서 삭감한다고 하더라도 급여의 돈은 이미 용도를 정해 놓았으니 난감하였다. 그녀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꽃병을 잽싸게 쥐려 했으나 손이 물건에서 빗나갔다. 위기일발의 시각, 최시환의 손이 추락하는 꽃병을 허공에서 낚아채었다.
  • 꽃병은 안전하였으나, 그것을 잡으려던 정율의 동작이 너무 커서, 그녀는 몸의 중심을 잃은 채 옆의 의자로 몸이 쏠리었다. 그녀는 아차! 하고 모든 것이 끝날 각오로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넘어져 가는 그녀의 몸을 최시환이 귀신처럼 받아안았다. 쿵 하는 소리와 몸의 통증을 기다렸으나, 이외로 따뜻한 품이 느껴져 눈을 잠시 뜨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걸쭉한 숨결이 귀가에 들려왔고 안정감이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 최시환은 정율의 꼭 감은 두 눈을 찬찬히 쳐다보면서 가쯘하고 긴 눈썹의 움직임에서 그녀가 아름답다는 인상을 살짝 받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금방 느낀 여자에 대한 느낌을 마음속에서 털어내었다.
  • “빨리 눈을 떠!”
  • 무뚝뚝한 최시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정율은 수줍은 듯 눈을 천천히 떴다. 눈앞에 나타난 최시환의 각선미가 있는 얼굴을 보자 몸에서 뜨거운 것이 꿈틀거리었고 낯이 빨갛게 타올랐다.
  • “대표님, 감사해요.”
  • 정율은 최시환의 팔에서 황급히 몸을 빼고 나가려다가 헛발을 내디디는 바람에 또 한 번 휘청이었다. 이번에도 최시환의 긴 팔이 정율의 허리에 닿으면서 그녀가 몸의 평형을 이루게끔 지탱해 주었다.
  • 이 시각, 열려 있는 사무실 문가에서 한 쌍의 눈이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금연이었다. 그녀는 최시환을 찾아오다가 얼떨결에 방안의 광경을 엿본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과 분노, 질투의 감정이 엉키어져 있었다.
  •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의 여자애들 낯이 두껍기로 이 지경이라니? 골드 미스터라면 아마 달려들어 잡아먹기라도 하겠어!’
  • 그녀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노크하면서 말했다.
  • “대표님, 아까 요구한 서류를 가져왔어요.”
  • “들어와!”
  • 최시환은 쌀쌀하게 말하면서 정율의 허리에서 팔을 떼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고 말했다.
  • “앞으로 조심해.”
  • 정율의 얼굴은 가을철의 탐스러운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 있었다. 실수한 것에 약간 낙심을 하였지만 속으로 왠지 모를 즐거움이 있었다. 즐거움이란 바로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안정감이었다. 그녀는 오래도록 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였다.
  • “대표님, 명심할게요.”
  • 정율은 최시환의 곁에서 옆으로 빠져나가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고 말했다. 최시환은 청자기 꽃병을 원위치에 갖다 놓았다. 그는 청자기 꽃병이 진귀한 물건이라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녀가 오자마자 그 물건을 만지는 용기에 살짝 놀랐다. 장금연은 정율을 대놓고 책망하고 싶었지만, 일인자인 대표를 앞에 놓고 뭐라고 할 수 없어 공식적인 부분에 신경을 썼다.
  • “대표님, 받으세요.”
  • 장금연은 최시환의 사무 책상 앞에서 똑바로 자세를 취하고 공손하게 서류를 그의 책상머리에 놓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 “대표님, 오늘 점심은 뭘 드실까요? 양식 아니면 한식?”
  • “한식으로 해! 게장 비빔밥으로.”
  • 최시환은 시뚝하게 말했다. 그는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화제를 돌려 말했다.
  • “이런 일은 정율에게 인계하라고 했잖아. 아직도 안 가르쳤어?”
  • 그의 말에는 장금연에 대한 불만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장금연은 대뜸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최시환을 모시면서 그의 호감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그의 마음속에 어떠한 오점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 “대표님, 죄송합니다. 전 오늘 정율 씨 앞에서 시범을 보이면서 가르쳐줄 생각을 했어요.”
  • 그녀는 급히 이유를 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일을 진행하는 데에는 그녀의 사적 욕심도 있지만, 기실 최시환을 위해서였다. 새내기 신입사원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하면 그의 심경이 나빠질 까봐 걱정하였던 것이다.
  • “나에 관한 개인적 업무를 다 정율한테 넘겨! 사흘 내로 인수인계를 끝내.”
  • 최시환은 차갑게 말했다.
  • “네. 알겠습니다.”
  • 장금연은 지시에 응하였지만 속으로 이번 인수인계를 못내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다. 정율의 입사로 그녀에게 천적이 나타난 것만 같았고 최시환에 대한 연민의 정을 표 달할 공간을 빼앗긴 듯하였다.
  • 정율에 대한 질투와 분노는 지금 이 시각 급속도로 불타올랐다.
  • 점차 사고 속에서 안정을 찾은 정율은 장금연의 기색을 읽고, 자신에 대한 그녀의 적대관계가 정식 막이 올랐음을 느끼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이 무고하다는 것을 해명할 기회는 없었다. 설사 기회를 준다 해도 그 내용을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장금연은 자기 멋대로 판단할 것이고, 정율이 해명하려 노력할수록 더욱 반대 방향으로 의심할 게 뻔하였다.
  • 장금연은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쳐다보고는 평온한 어조로 정율을 향해 말했다.
  • “정율 씨, 저를 따라오세요. 인계할 사항을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 최시환이 그녀의 말을 듣고 끼어들면서 말했다.
  • “장 실장은 음식 주문하는 것부터 먼저 가르쳐줘. 기타는 내가 말할 테니.”
  • 최시환은 장금연더러 차근차근 가르쳐 나가라고 알리고 싶은 것이었다. 어차피 힘든 체력 노동이 아닌 만큼, 아무리 머리가 나쁜 사람일지라도 실천하다 보면 숙련되기 마련이라 생각하였다. 장금연은 최시환의 말을 듣고 마음이 통째로 비워지는 듯한 허전함을 느끼었다. 모든 것을 바쳐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현재는 그 마음을 표현할 공간이 없어진다는 게 너무 슬펐다. 그녀는 수그러든 목소리로 답했다.
  • “네. 알겠습니다.”
  • 사랑이란 그 깊이가 어느 정도 깊어지면 사람을 보잘것없이 만든다고 했다. 사랑이 깊을수록 사람은 더 비굴해지어, 먼지 속의 알갱이로 자리 잡을지라도, 사랑의 꽃에 대한 환상은 더 커져만 가는 것이다.
  • 정율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자신이 난처한 국면에 끼어 있음을 느끼었다. 최시 환은 장금연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혹시 자신을 지난주 금요일 사건처럼 방패막으로 쓰려는 건 아닌지 의심하였다.
  • 비록 마음속의 의구심이 현실로 되지 않길 바라지만, 자신을 이곳에 개인 비서로 투입한 목적이 바로 방패막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업무와 개인감정의 계선을 함부로 넘어선 안 된다는 것을 현실로 배우고 있었다.
  •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장금연의 곁에 와서 공손하게 말했다.
  • “장 실장님, 같이 가시죠.”
  • 웃는 낯에 매를 휘두르지 못한다고, 그녀가 자세를 낮추어 일에 열중하다 보면 신분과 지위가 있는 장금연도 그녀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