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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으름장을 놓다

  • “최 대표님, 안녕하세요.”
  • 정율은 그를 보자 급히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었다. 최시환은 기다란 다리를 옮겨 엘리베이터에서 성큼 나오면서 물었다.
  • “너 여기서 뭐 해?”
  • “16층 인사팀에 갈려는데 엘리베이터 키가 없어서 그래요.”
  • 정율은 급히 대답하였다. 16 층까지 걸어 내려가려면 시간도 많이 허비하지만, 체력의 소모도 만만치 않았다.
  • “따라와!”
  • 최시환은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앞에서 걸었다. 이때 장금연이 마침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광경을 목격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 “정율 씨, 키가 없이 혼자 어떻게 내려가요? 내가 이미 전화해 놨으니 저를 따라가면 돼요.”
  •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나한테 시위하는 건가?’
  • 정율은 향후 날마다 고약한 이 여자를 마주 보며 일할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났다. 정율은 자신에게도 경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참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묵인으로 그녀의 거짓말에 호응하자니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 “죄송해요. 제가 장 실장님께 자세한 것을 물어보고 나올 걸 그랬어요.”
  • 정율의 말은 사실이었으나, 책임 면에서 장금연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한 말을 장금연이 어디까지 이해할지 개의치 않았고, 일종 그녀에 대한 교묘한 반격이라 생각하였다.
  • 최시환은 이미 살을 찌푸리고 장금연을 바라보면서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 “네가 직접 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수속을 밟아. 시간은 십 분이야!”
  • 장금연은 최시환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린 것을 알고 다급히 고개를 숙여 네, 하고 응답을 하였다. 한편으로 정율에게 눈치 주어 자기를 따라올 것을 암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다른 비서에게 핸드폰 메시지를 날렸다.
  • “최 대표님이 오셨으니 아침 차를 빨리 따라드리세요!”
  •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금방까지도 피었던 장금연의 웃음이 갑자기 사그라지고 불쾌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 “다음부터 말할 때 조심해요. 최 대표님은 자질구레한 말을 듣기 싫어해요.”
  • 장금연의 말은 귀띔이라기보다 경고에 가까웠다.
  • 정율은 그녀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일은 자기가 벌이고 지금에 와서 적반하장격으로 남을 탓하는 것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현실 속에는 타인의 인내심을 나약성으로 착각하고 더 괴롭히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 세대 젊은이들은 이미 그런 인내심을 버린 지 오래되었고 정율도 예외가 아니었다.
  • “전 남의 뒷이야기나 시비에 관해 관심이 없지만, 다른 사람이 날 괴롭히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 정율은 쌀쌀한 기색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 그녀는 직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남한테 괴로움을 당하면서까지 직장을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장금연이 짝사랑하는 최시환은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적당한 기회에 그녀에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다면 자기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 정율의 일침에 장금연은 깜짝 놀랐다. 따지려고 생각하다가 업무를 고려하여 참고 말았다. 앞으로 업무상에 그녀를 대처할 카드가 많다고 생각하고 차가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 “그럼 됐어.”
  • 엘리베이터가 땡! 하고 소리 내면서 16층에 멈춰 섰다.
  • 인사팀의 담당자는 장금연이 친히 사람을 데리고 온 것을 보고 살짝 놀랐다. 담당자는 고위층에서 중시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재빨리 입사 수속을 마무리하고, 정율에게 사원증과 엘리베이터 키를 발급해 주었다. 두 사람이 다시 꼭대기 층의 사무실에 왔을 때,  최시환이 금방 사무실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 “정율 씨는 가서 내 사무실 청소를 깨끗이 해놓아. 장 실장, 오늘 일정표를 정율 씨한테 주고 업무에 관한 거 다 가르쳐 줘.”
  • “네. 알겠습니다.”
  • 정율과 장금연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 장금연의 곁에서 일하는 이상, 정율은 그녀의 발톱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차례질 매는 피할 수 없었다. 최시환은 그녀들의 곁을 지나다가 잠깐 멈춰서 긴장해 하는 정율을 쳐다보고 혹시 자기의 지시가 잘못됐나 의심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장금연의 태도는 정율에 비해 온화하였으나 최시환이 자리를 뜨자 대뜸 뾰로통한 기색으로 바뀌면서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직원 수칙이라 적힌 책자를 정율 앞에 내던지면서 말했다.
  • “여기에 적힌 것들을 숙지하도록 하세요! 먼저 최 대표님 사무실에 가서 청소나 깨끗이 하고 와요!”
  • “알겠습니다.”
  • 정율은 지시를 받고 책자를 가지고 최시환의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한 가지 문제를 발견하였다. 사무실이 깨끗이 청소되었고 정리가 잘 되어있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난감하였다. 금방 엘리베이터 키의 경험을 참고하여 장금연한테 가서 구체적인 것을 물어봐야 했다.
  • “장 실장님, 대표님 사무실 어디부터 청소할지 가르쳐주세요.”
  • 장금연은 그녀가 올 줄 미리 예견이나 한 듯 코웃음을 쳤다.
  • “아직 어딜 청소할 줄도 몰라요?”
  • 그녀의 목소리는 사무실 직원들의 귀가 쟁쟁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그녀는 이런 요란한 방식으로 정율의 인격을 비하하고 싶었다.
  • 정율은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만사에 진지하게 임하려 생각하였다.
  • “제가 확실히 몰라서요.”
  • 정율도 목청만큼은 높이었다.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신입이기 때문에 면죄부는 있는 것이고, 이를 장금연이 설명해 주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 장금연은 불쾌한 기색으로 그녀에게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 “내가 하나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줄게요. 이렇게 눈치 없어서야 어찌 업무를 보겠어요? 경력이 없는 사람은 애당초 뽑지 말아야 한다니깐.”
  • 그녀는 말하면서 사무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 ‘경력은 워낙 없다가 있는 게 순서 아닌가! 금방 사회를 나온 졸업생한테 경력을 요구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않잖아!’
  • 정율은 장금연의 말을 듣고 심기가 불편하였다. 그녀는 금방 졸업한 사람에게도 우세가 있다고 믿었다. 백지장처럼 공백이 있으니 회사의 그림이 오염 없이 그대로 그려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장금연이 아까 오래 못할 수도 있다느니, 경력이 없어 안된다느니 떠들어대기에, 그녀에게 실권이 있다면 자신을 미리 채용에서 배제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오늘 입사하게 된 것을 보면 그녀가 주도한 것이 아닌듯하였다. 그녀가 아무리 기고만장해도 자신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희망은 살아있었다.
  • “걸레를 물에 헹구어 잘 짠 다음, 이 사무집기들을 닦으세요. 이후부터 매일 닦아야 해요. 대표님 사무실의 어느 구석에도 먼지가 있어선 안 돼요.”
  • 장금연은 손가락으로 사무집기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정율은 그 말을 듣자 업무량이 적지 않음을 느끼었다. 개인 비서로 사적인 편안한 업무만 골라서 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전문 청소부보다 더 힘들 것 같았다.
  • “네.”
  • 그녀는 짤막하게 답했다. 이 자리에서는 그냥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혹시 다른 주의 사항이라도 있어요?”
  • 그녀는 번번이 와서 묻는 것보다 한꺼번에 묻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 “먼저 이 일부터 진행하세요. 조금 후 최 대표님이 오실 거니까 점심 식사를 주문시켜야 하는데, 그때 되면 내가 알려줄게요.”
  • 장금연은 차가운 기색으로 말했다. 그녀는 최시환과  접촉하는 일에서 다른 여직원의 손을 거치는 것을 싫어하였고 자신이 직접 챙기고 싶었다. 그녀는 최시환의 식사를 직접 챙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이 보통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다.
  • “네. 알겠습니다.”
  • 정율은 시원스럽게 답하였다. 기실 방금 한 그녀의 말에 숨겨진 의도를 알 리가 없었다. 눈앞의 일은 정율이 입사하여 시작한 첫 업무이다. 비록 머릿속으로 과정을 수십 번 넘게 되뇌었지만 실제로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업무의 진수는 경력을 쌓으면서 이해하는 것이지 말로써 전달하는 게 아님을 현실 속에서 느끼었다.